Virtual Love - 月綾님 A.D 2099 21세기 초만해도 버츄얼 이미지 아이돌이란 꿈속에서나 존재하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었다. 기껏해야 CG나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버츄얼 이미지... 버츄얼 아이돌이 과연 인간을 제치고 사람들 속에 자리잡을 수 있느냐...라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수십명의 아이돌이 그 수명을 달리했고,그들은 싼값에 팔려나갔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마치 나이든 창부가 섬으로 팔려가듯...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인류의 60%가 프로그래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그저 가장 많은 종사자를 보유하고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어디 명함을 내밀어도 다들 흐응~하는 별다른 임팩트를 줄 수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직장이 IM이라는 것... 약 5년전에 출범한 이 IM은 1년만에 정상궤도에 오르더니,지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OA소프트웨어계의 황태자...아니..황제가 되었다. 학부생 시절...우연히 해킹대회에 나갔다가 IM의 인사부장의 눈에 들어 지금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우습게도 나는...프로그래머라기 보다는... 시스템 체크팀에서 일하고 있다. 형식상의 일로 새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를 시범으로 가동시키고 버그를 찾아내서 수정하는 것이 내 일이다. 그렇다...그게 내 일이었다... "뭐야..진.언제까지 그 고리타분한 체크팀에서 있을건데?" "...재밌잖아.버그 수정하는것도..." "바보 아냐?MIT 수석한테 버그 수정이라니..이 회사가 미쳤나...내가 인사과에 얘기할까?" "됐어..." 학부시절 동기였던 미야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신입사원의 교육과 실력검증은 시스템 체크팀에서 하고 있었다. 체크팀은 보통 2~3개월이면 졸업하는 것이 왠만한 사원들의 경력... 하지만,나는 이곳에서 벗어나길 거부했다. 3달에 한번꼴로 나를 영입한 인사부장이 개발팀으로 보내려고 말을 꺼내지만.... 난...거절한다. 내가 내세우는 이유는... "시스템의 완전성은 버그수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다. 하지만...진짜 이유는 다른곳에 있다. 가까운 곳에 있기 위해서이다... 사장실 바로 옆에 오픈되어 있는 이 자리가 좋다. 그를 보기 위해서... IM의 사장이자 실리콘밸리의 이단아에서 실리콘밸리의 황제가 된 그 남자. 이안 루. 차분한 색의 블루블랙 헤어... 부드럽게 넘긴 머리칼 아래의 반듯한 이마와 뭍 여성들의 시선을 잡아채는 날카로운 콧선... 중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라는...그의 출생은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남자. 고집센 턱선과 살짝 미소지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를 사랑한다... 그를 본 순간,나는 정보통신부의 고위공무원이 될 자리를 거절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미쳤다고 하셨고,특히나 UN산하의 국제정보부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더했다. 아버지는 내가 형들처럼 육군사관학교에 가길 원하셨다. 하지만,천성적으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틀어박혀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나를... 우리집은 오래전에 내버려 두었다...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참아내고 나는 이곳에 와 있다... 남의 신상정보나 캐내는 바보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던 통신부 자리였는데.. 나는 입사하자마자,통계청 서버에 들어가서 이안 루에 대해서 알아냈다... 우습게도...정말,한순간에 반한 남자 때문에 죽어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망설임 없이 해버렸다. "자.다들 퇴근 안하나?" "사장님...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네요?" "^-^ 배가 고파서 말이야~" "후훗..집에 가봤자 메이드시스템이 해주는 밥일텐데요~" "우리 메이드는 프랑스 요리에 능하거든~" 같이 일하는 앨리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치고 손에 들고 있던 버버리를 툭툭 털어내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그.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그들과 휩쓸려 퇴근했다. [진.어서오세요.목욕물 받아놨습니다.] "고마워." [온도는 저번처럼 37도씨로 했는데 괜찮으시겠죠?] "응."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별로..먹고싶지 않아." [진.요즘 진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미안...루...내일부터는 열심히 먹을게." [그렇게 하세요.] 메이드 루... 우습게도 처음 이집을 사고,메이드 고객파일을 포맷하고 새 이름을 입력할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RUE라고 쳐 넣었다. 엔터키를 치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게 무슨 더치와이프에게 연예인 이름을 붙이는 10대도 아니고... 바보같은 나...ㅋㅋ 2050년경 인류는 신의 마지막 재앙이라 했던 에이즈를 정복했다. 하지만,그건 신의 마지막 재앙이 아니라,경고였다. 지금의 인류는 에이즈가 아닌 에이즈베타에 시달리고 있다. 이전의 에이즈라면 안전했을 콘돔의 사용이라던가 가벼운 키스만으로도 감염될 확률이 50%이상이었다. 그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가진 영장류는...버추얼 아이돌을 개인용 PC에 이식한 더치와이프/허즈를 만들어냈다. 21세기 초에 사라져가던 버추얼 아이돌은 이렇게 재탄생 되었다. 섹스머신...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성을 표방하는 인류는 이 더치와이프/허즈를 사용하기 위한 전신기계를 발명했는데..그것의 이름이 러브머신... 러브머신에도 여러급이 있지만,전신을 감싸는 러브머신 델타가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고,인기있는 더치 소프트웨어들 역시 대부분이 델타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요즘은 고급지향형의 러브머신 제로에 맞춤형 더치 소프트웨어가 인기를 끄는 모양이지만,워낙에 고가라 웬만큼 섹스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델타형으로 만족한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간단하게 보드카 한잔을 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주일전에 개발팀의 미야기가 눈웃음을 치면서 건내준 프로그램... 개발팀의 회의에서 고급지향형 러브머신 제로의 맞춤 소프트웨어에 대적할 소프트웨어 개발을 결정했다고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이 메이킹바디 프로그램... 물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데모 버전이지만,완성도가 높아서 아직까진 버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메이킹바디... 인간의 섹스중의 상상력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 이 메이킹바디의 주안점이다. 섹스파트너의 몸과 얼굴을 자신의 꿈속의 마돈나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했지만...자신 역시 섹스장면 녹화(관음증 환자를 위한 메뉴일까...ㅋㅋ)에서 얼마든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배가 나온 중년이라면 포르노필름의 주인공처럼 단단한 가슴과 王자가 새겨진 복부를 갖게 할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은 몰라도,신체의 각부분을 세세하게 묘사한 수천개의 CG를 조합해서 만들어가는 몸과 얼굴은 마치 내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 소프트웨어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면...네트워크 상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마치 머그게임과도 같다... 섹스에 미친 인간들은 컴퓨터가 해주는 소프트,레귤러,하드....이 등급의 섹스는 신물이 난 것 같았다. (물론,특정인들을 위한 SM 버전이나 로리타를 내세운 소프트웨어들도 있지만...) 인간과 인간의 섹스라는 것 만한 것은 없겠기에...생각해낸 것이리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네트워크에서 찾는다는 것... 마음이 맞으면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곧 바로 세팅된 여러개의 배경에서 섹스를 시작한다... 그것이 이 프로그램이다... 난 이 프로그램을 디코더로 돌려서 기본적인 버그 체크를 마친 뒤에 실제로 가동시켜 보았다. 용량이 용량인만큼 코딩체킹만으로도 일주일이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코딩체킹은 건너뛰고 실제로 플레이 해본 모양인지... 아침마다 은밀한 목소리로 낯뜨거운 농담을 내뱉고 있었다... 그 소리에 내 얼굴마저 달아오르는 듯 해서...나는 코딩체킹만 하겠다고 말해버렸다... 그런데... 이걸 두고 내숭이라고 해야하나... 어머니가 말했던가...뒤로 호박씨 깐다고...ㅋㅋ 한국인 이민 2세인 어머니의 말이니만큼 그런 속담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리라... ME 라는 메뉴의 아이콘을 클릭하고 이메일로 받은 매뉴얼에서 미리 골라둔 이미지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별빛을 뿌린듯한 달콤한 플래티넘 블론드... 꿀같이 반짝이며 잡티며 그늘하나 없는 건강해 보이는 상아색 피부... 가늘고 긴 팔다리...키는 178정도로 정해두자...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매를 만들고,삶은 계란처럼 눈코입이 없는 버츄얼 이미지를 바라봤다. 잠시 소름이 돋는다. 서둘러,얼굴의 세부부분을 정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아치형의 다갈색 눈썹...초록빛의 지중해색 눈동자... 동양인인 나의 그저 둥글게 찢어놓은듯한 눈매가 아닌 얄팍한 눈꺼풀에 깊게 패인 쌍커풀... 둥글게 말린 긴 속눈썹을 정하고,오똑하고 완벽한 선을 갖고 있는 콧날을 선택했다. 도톰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핑크빛 입술을 골랐다... 다 완성된 이 메이킹바디 안에서의 나는 완벽한 꿈의 요정이 되어 있었다. "그럼..시작해 볼까...." '음성은?본인인거야?' '아..그건 지금 사운드 믹스 중인데...좀 시간이 걸릴거야.성우나 유명배우들 섭외하니까.섹시보이스의 리서치 결과도 아직 안 나왔고...^-^어차피 그건...서비스 버전으로 판매할거니까...우선 이것만 해줘.' 어째서 완벽한 이상형을 만들어두고 안 어울리는 본인의 목소리를 써야하는지... 미야기는 보이스파일생성에 대해서 장대하게 설명하진 않았다. 뭐,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니... 그때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코딩체킹만으로도 지칠때는 보이스파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저 꿈의 요정과 내 목소리가 어울리기나 할지... 내가 만들어낸 버츄얼 이미지에게 사과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건...어쩔 수 없는 자신감 결여의 성격때문이겠지. 이런저런 움직임을 해보고,빠르게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면서 화면속의 꿈의 요정이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같은 움직임이라도...저렇게 사랑스러울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에 새삼 내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볼품없는지 깨달았다. 사실,예전엔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사교성 없고,내성적인 사람이었을 뿐이었고. 거울을 보고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지금은...완벽한 자기비하에 자신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었다. 그건..그 때문...... 이안 루...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학부시절이나,어렸을때는 일본인형이니,중국사기 인형이니..하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예술품같이 아름다운 것이 아닌...기념품으로나 살만한 어린아이 인형을 말하는거다.) 어머니도 뻣뻣한 형들과 달리 키도 작고 여리여리한 나를 귀엽다고 말해주셨었고... (형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니...늦둥이에 대한 편애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새카맣고 어머니쪽 유전으로 곱슬거리는 숱많은 머리칼과 시체처럼 허연 얼굴에 그당시엔 도톰했던 빨간 입술 덕에...(지금은...후훗..) 유치원에서 백설공주를 하기도 했다. (...마녀역의 루비는 이웃집 아이로 나를 골려먹는게 취미였는데,역시나 날 구박하기 위해서 백설공주를 시킨거였다.) 고교시절...여자친구도 꽤 사귀었고,학부시절엔 정체성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인기 있는 수학부의 킹카와 사귄적도 있었다... 특별히 잘나진 않아도 못나진 않았다...그래도 표준을 조금 윗도는 외모... 그게 나였다. 그런데... 이안 루가 사귀거나,만나는 사람들..이전의 연인들을 보고 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10살에 비행기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결핍인지...마더콤인지... 금발머리의 상아색 피부...를 선호했다. 그러니까...간단하게 말하면 프랑스식 요정같은 마돈나가 그의 이상형인 것이다. 더구나,어머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라고 할만큼 빨리 재혼한 그의 아버지가 데려온 여인은 한국계... 그래서...그는 동양인을 싫어했다. (자신은 동양계가 아니야?라고 물어봐도...프랑스계이니...동양인이다!라고 봐줄 외모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알굵고 새카맣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시체처럼 허옇게 뜬 피부...(원래 나같은 컴퓨터 오타쿠들이란...) 제발 입술만은 자라지 않길 빌었는데... 먹는데로 쑥쑥 자라서는... 빼족한 턱선 안에 자리잡은 소세지 같다....(너무 심했나...) 도톰이 아니라 두툼하다는 사실에...그 미묘한 단어의 차이에 나는 절망해야만 했다... 뭐..이런 입술을 육감적이고 섹시하다고 봐준다면야... ...하지만,문제는 눈... 뚫린 구멍만 클 뿐인 쌍커풀은 오른쪽에만 간신히 속쌍커풀이 있는 눈매에... 이왕 토종 한국인이라면 새카만 눈동자가 좋겠건만... 색엷은 갈색 눈동자는...조금만 잘못 봐도...황달기 있는 노랑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키는 작고...(175를 간신히 넘겼다...여자라고도 착각할만한 미야기보다도 작은키다...) 동양계 답게...허리도 긴편...(그래도 집안에서는 비율적으로 가장 긴다리를 갖고 있다.) 한가지 위안은...그래도 머리는 작은편이라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한눈에 반해버린 남자는 나같은 얼굴에,나같은 몸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런 남자다. 그에게 있어서...난 열외의 인간인 것이다.. 있으나,없으나..신경쓰고 싶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 내 뒤쪽의 벽거울에 비친 나와....내 앞의 모니터 속의 요정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움직임을 체크해보고...난 곧바로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섹스를 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하겠지만,러브머신으로 하는 섹스는 싫어한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지만... 차라리 내 손으로 해결하지,기계와 몸섞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히..게이섹스의 러브머신 소프트웨어는...대부분이 하드한 것이라... (어째서 하드 아니면 SM인건지...) 세일에서 산 소프트웨어를 돌렸다가 다음날 출근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나마 러브머신의 모조페니스를 옵션사양에서 따로 고르지 않고 그냥 주는대로 받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이디를 입력해 주십시오.] 안내문구가 뜨고 잠시 커서가 깜빡이는 창을 보고 고민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아르바이트로 버그체킹을 하는 학생들고 받았을 것이고... 개발팀의 야심찬 프로젝트인데다...누구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IM의 전사원이 이걸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원수도 그 수가 대단하기 때문에 아마도 퇴직할때까지 얼굴도 못 볼 인간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NAEJ] 내 이름 JEAN의 철자를 거꾸로 한...너무 단순해서 알아보는게 아닐까... 그럴리가...아이디 중복이 안되기 위해서 아무거나 쳐넣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라는 자기위안을 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상냥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서 내 이름을 불렀다. [어서오세요.나에쥬.] 그녀가 그렇게 발음해 버리는 바람에... 난 나에쥬가 되었다.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서 나는 러브머신에 전신을 펴고 기대 누웠다. 버튼을 눌러 러브머신의 캡슐을 닫고 이미지 글래스와 뇌파감지기를 연결했다. 아까의 컴퓨터 모니터 속에 들어간 나... 난... 꿈의 요정 나에쥬가 되었다...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해보다가..그만 문을 잘못 치고 말았다. 프로그램은 내가 그 문을 두드렸다는 것으로 오인하고 문을 열었다. 아직 정원이 안찬 방이었는지..열린 문... 방안을 보고 난 당황했다. 아... 이런... 그 방은 RAPE 방이었다... 안에는 울고 있는 여자와 몇 명의 소년들이 있었고...한참 섹스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도대체가 밤에는 이러고 낮에는 멀쩡하게 출근한다... 인간의 양면성에 다시한번 탐복하면서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갔다. 이 안에서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한거지..섹스를 할 생각은 없다. 그건 내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버그를 체킹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내일은 클럽에라도 가서 정기혈액검사증을 갖고 있는 남자와 섹스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까의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 방 제목을 잘 골라서 들어간 방은... 게임클럽이었다. 물론 섹스를 위한 소프트웨어이니 게임클럽이라고 해도 곧 눈이 맞으면 나갈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몇마디 대화를 하면서 버그를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을 중점에 두고 문을 노크했다. 일반 바를 연상시키는 영상... 그 안에 있는 모든 소품들을 실제와 같이 만지고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미야기가 꽤 신경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트를 하면서 데이트의 물이 오르기 시작한 커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다들 완벽한 사람들... 마치 헐리우드의 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이 안에 들어오니...내가 만들어낸 꿈의 요정도 시선을 잡는 외모도 아니었다. 안도감과 묘한 섭섭함을 느끼면서 바의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단한 레몬칵테일을 시켜서 한모금 마셨다. 실제로 마시는 것 보다 더 신 맛이 강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뇌파를 조정하는 커넥트의 문제이다. 이런 레몬칵테일 하나까지 신경을 쓰다보면 소프트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시디 신 레몬칵테일에 대한 맛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다만...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고, 싸한 알콜이 들어갔다는 신호가 몸에 들어오면서 입술이 말라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 담배나 피울 요량으로 라이터를 찾는데,뒤에서 누군가 라이터를 들이밀어 불을 붙여준다. 누구....? 뒤를 돌아보니... 다갈색 머리칼의 큰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긴 남자... 실제로 이런 남자가 존재한다면 맥주광고에 나와서 섹시함을 자랑할만한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이 완벽한 버츄얼이미지들의 세상에서 그는 평범해 보였다. 아니..그래서 그 평범함에 눈이 갔던 것일지도... 그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옆에 앉아도 돼?"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가 의자를 꺼내서 긴 다리를 걸치듯이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시고 있지?" "레몬칵테일..." "맛은?" "너무 셔..." 내 말에 그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왠지 입꼬리를 당겨 웃는 그의 얼굴이 이안과 겹쳐졌다. 그랬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러브머신의 소프트웨어와는 다르다. 물론,사이버 상에서 만난 인간이지만...그래도 인간이라는 것일까... 아..이 소프트웨어 정말 섬세하게 잘 만들어졌군.... 머릿속에서는 이 남자의 손에 의해 달아오르는 육체를 식히려는 듯... 버그를 체킹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아..아무것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군."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쓰게 웃었다. "..아..미..미안..." 나는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과했다. 이건 러브머신의 소프트가 아니라고...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비록 버츄얼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인간인 것이다. "불량한 파트너로군..." "...러..러브머신은 적응이 안돼서...미안." "이런~그건 여기서 금기의 말이야." "..그런가.." "오늘 처음이야?" 도대체,이남자 이 소프트 받자마자 뛰어든건가? 고작 일주일이 지났는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턱을 감싸 쥐었다. "오늘 처음 등장한 이런 천사를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되다니 말이야...기분 좋은데.." 그는 기분좋게 정말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을 머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내 감정은 그 속의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칭찬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쓴 웃음이 나왔다. "..왜?" "..아..아니..아무것도...난 환상이니까..." 그의 의문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침대에 몸을 누였다. 매끄러운 실크시트의 감촉이 맨 등을 감쌌다. '부드러움'이라고 명명된 감각이 뇌파를 타고 전신에 흐른다... "...환상이라...뭐..그래도 이런 천사를 만난게 행운이지...^-^" 그는 웃으면서 내 입술에 키스했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곧 농밀해졌고, 실제의 내 입안에 타액이 가득해졌다... (물론,러브머신의 이온액체이겠지만...) 그의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내 온몸을 누비고 있었다. 때론 부드럽게,때론 거세게... 그의 손길에... 그간의 금욕생활이 완전히 풀어져 버렸다. "..하아......좀..천천히 해...숨도 못 쉬겠어..." "금욕생활이 너무 길었군...애인 없는거야?" "...쿠쿡...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러브머신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했다. 하지만,내 입은 곧 신음으로 막혀 버렸다. 그의 혀가 내 하체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랫배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해지고,내 페니스를 감싼 러브머신의 막이 혀의 표피로 전환되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입이 내 페니스를 가득 물고 혀를 놀리고 있었다. 하아..이건...저번의 그 소프트보다 낫잖아... 잠시의 기막힘에... 혹시..이 남자 고도의 인공지능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내일 출근하면 미야기에게 오리지날 캐릭터도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하면서... 그가 빤히 쳐다보면서.. 눈빛으로 또 다른 생각해..불량한 파트너..라고 했기 때문에... 쓰게 웃어버렸다. 애널 입구를 부드럽게 벌리면서 들어오는 손가락... "...이런..." "..그런 소리 내지마." 그의 손가락이 들어와 놀란 내 근육이 반사적으로 조여들자 그가 웃으면서 감탄했다. 왠지 바보취급당하는 듯 기분이 나빠졌다. "미안...귀여워서 그런거야..." "..흐응.."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런 내 턱을 잡아다 자신을 보게 하고는 또 다시 키스해 왔다. 온 몸이 나른해지도록 온 입안을 헤집는 느낌에 취했을 때... 그가 들어왔다... "...하아.....앗.....처..천천히...아..아팟..." 인상을 쓰면서 신음하는 나와 찡그려진 눈썹을 펴주면서 웃는 남자. 거세게 조여대는 덕에..그 역시 약간은 괴로운 얼굴이다. 이거야 원... 차라리 러브머신의 소프트랑 하는게 낫잖아. 젠장...첫경험의 풋내기도 아니고...창피해 죽겠군. 정말 이 남자와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창피했다. 하지만,그런것도 잠시...용케도 내가 느끼는 부분을 찾아내서 그곳만 집중적으로 찔러대고 있었다. 이 남자..프로구만... "....쿡..." "웃어?" "...응..왜?....아..하악.....읏...심술궂긴...앗...아파!" "귀여운 천사가 말이지...사실은 너무 냉담한거 아니야?날 좀 봐달라구..이렇게 온 몸으로 울어대는데 말이야." 이 남자는 실제생활에서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까... 어쩌면 어울릴지도...물론,이런 외모라면...ㅋㅋ "미안..." 난 심통을 부리는 듯한 남자가 귀여워서 손을 들어 그의 양뺨을 감싸쥐고 웃었다. 그저 웃는것만으로도 지금의 내 얼굴은 꽤나 사랑스럽겠지... 섹스장면을 녹화해서 보는 사람들이 관음증 환자라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다. 지금..난 나의 버츄얼 이미지가 이 남자에게 안겨있는 것을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콧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가 내 허리를 세게 안아왔다. 그리고는... 갑자기..내 몸을 일으켰고... 그 덕에...몸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오는 남자.. "흑..!!!!" "...키스해줘." 내가 힘들어 한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입까지 내밀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가 귀여웠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려는 순간...그의 입술이 달려들어 내 입을 먹어 버렸다. 완벽한 테크닉의 키스와... 이제는 달아오를데로 달아올라 그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는 내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색정적이었나...싶을 정도로 허리를 흔들어댔다. 역시..뜨끈한 이온액체가 내 몸 안에 뿌려지고... 그가 내 허리를 잡고 내 몸을 자리에 뉘여주었다. "...좋았어?" "......" "왜 대답이 없어?애인보다 못했나?" "..애인같은거 없어." "정말?..." "왜?" "아니...수줍어하면서도...의외로 요부기질이 있는 것 같아서...사람들이 그냥 놔둔단 말이야?" "...쿡...자신의 얼굴이 아닐때는 안하던 짓도 하게 되는게 인간이야..그걸 명심해야지." 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슬슬 이 네트워크에서 나오고 싶어졌다. 몸도 피곤했고... 우선은 몸 안에서 식어가면서 젤리처럼 뭉쳐지는 이온액체부터 빼내고 싶었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사용후의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기 위한 서비스로 젤리상태로 만드는 짓을 했겠지만...당하는 입장에서는...정말 기분 묘한 느낌에..찝찝함이 극에 달하는 게..이 젤리화 되는 이온액체였다.) "벌써 가게?" "...피곤해.자고 싶어." "그냥 자자..." "...난 그냥 못 자.씻을거야." "아~결벽증도 있었어?" 남자는 내가 나가겠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말을 비꼬고 있었다. 어차피 섹스네트워크에서의 하룻밤인데..볼일 다 봤으면 일찌감치 헤어져서 각자 할 일 하면 되는거 아닌가?! 도대체 이 남자는 이걸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믿고 있는건가. "..결벽증이 아니야.몸안에서 젤리가 끈적이면서 뭉글거리는거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어?" "젤리?" 침대에 길게 누워있던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나를 봤다. 그의 허리를 덮었던 하얀 시트가 흘러내리면서 하복부가 드러났다. 잘 빠진 골반선과 미끈한 허리와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아랫배... 보는 것 만으로도 상대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젤리 몰라?" "..그게 뭔데?난 젤 같은거 안 썼어..." "...흥.." "아.그게 아니지.젤리가 나오는거야?그러니까..러브머신에서..." "...젤리가 아니라 젤리화 되는 이온액체." 이 남자는 러브머신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사용은 안해도 일단은 기계라면 관심을 갖는 나와,사용자체를 안 해보는 듯 전혀 모르는 이 남자. 이온액체를 뭐라고 설명해야한다....라는 것에 난 고심해야만 했다. 차마 내 입으로 어쩌고 저쩌고..설명하기...정말 낯 뜨거운 것 아닌가. 뭐..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람이니..떠들어 볼까...ㅋㅋ "..당신꺼 말이야...러브머신에서는 그게 이온액체로 나온다고...뒷처리를 위한 깔끔한 서비스 정신으로...러브머신 제작자가 그걸 젤리화 되는 이온액체를 썼어...그러니까.지금 내 몸 안에 젤리덩어리가 미끄덩거리고 있단 말이야." "아~그런거야?꽤 투철한 서비스 정신이네~^_^" "투철이 지나친거야.자기 몸안에서 젤리가 미끄덩 거리는거 좋아할 사람 없어." 그의 별 대수 아니라는 말투에 화가 나버렸다. "음..그럼 내가 빼줄까?" 그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서 까닥까닥 하면서 말했다. 그의 그런 동작과 말이...거기다..그의 미묘한 웃음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됐어!" "아..저기..이름은 가르쳐줘." "...아이디?" "응." "내가 바꾸면 못찾을텐데?알아서 뭐하게." "얼굴 보면 알지~" "...쿡...얼굴도 바꿀지도 몰라...아놀드 슈워제네거 3세..같은 근육질로~" "...설마..." 나의 말에 그는 가볍게 웃었고,다가와서 내 어깨에 셔츠를 감싸주었다. 완벽한 에프터 서비스까지...매너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군... 이런건 평소 생활에도 베어있다는 것이겠지... "가르쳐 줄거지?" "...나에쥬." "응?" "나에쥬....아이디 말이야." "나에쥬...어울려." "거짓말이라도 고마워."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나를 물끄러미 보는 그를 봤다. "응?" "내 이름은 안 물어봐?" "...다음에...다음에도 나를 알아본다면 그때 물어볼게." 다음은 없다고 마음속에서 말하면서도 생긋 웃어보이고 방을 나왔다.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욕실로 뛰어들어간 나는 찬물이 나오는 것에 잠시 놀랐다. 메이드 루가 휴면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루를 다시 플레이 시키기에도 귀찮았기에 그냥 찬물에서 몸 안의 젤리만 꺼내고 서둘러 수건으로 몸을 쌌다. 아무리 그래도 한겨울에... 찬물 샤워는 좀 심했던 걸까... 요즘 식사를 제대로 안 해서 면역력이 떨어져 있을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피곤에 지쳐서 긴 잠에 빠져들었다. "오리지날?그런건 없는데...그거 만들 여력이 어딨어...서버 구축하는것만으로도 골때렸다구.." 미야기는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왜?마음에 드는 사람 본 거야?" "...그렇다기 보다는...18금 연애시뮬레이션의 카사노바 같은 사람이 있었어...그래서 오리지날이 있나 해서 물어본거야...인간이라기엔 허점이 없어 보였거든..." "오~완벽한 인간?누구야?아이디 가르쳐줘..나도 보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물어오는 미야기... "...아이디 몰라.안 가르쳐줬는데?" "...뭐야.진짜 카사노바잖아...이 소프트는 원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을 위한 건데 말이야~" 미야기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과연 이걸 그렇게 이용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제 첫 번째 방에서 본 레이프를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란...얼굴을 가린 상태에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 그것이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서버 안에서라면..거리낄 것이 없겠지... 얼마든지 미성년자를 농락하고,자신감이 넘치면서도 강간당하길 원하고,소심하면서도 잔혹하게 상대를 괴롭히고... 인간이 갖고 있는 숨어있는 그림자가 서버 안에서 그 얼굴을 드러낸다. "미야기!" 점심을 먹고 올라와서 담배나 한 대 피울겸 실내 공원으로 들어가던 미야기와 나는 복도 끝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사장님!" 미야기가 반갑게 웃으면서 그를 봤다. 이안 루...그를... "아.점심 먹었어?" "예.사장님은요?" "아..난 밖에서 약속이 있었거든...그나저나..이번 소프트 말이야."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프트의 얘기를 꺼냈고,미야기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 나만이 아직 그 서버안에 정신을 놔두고 온 듯 헤매고 있었다... "...진?왜 그래?...열 나는 것 같아."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보고 미야기가 물었다. "..아..아무것도.어제 찬물로 샤워해서...감기 기운이 좀 있어..괜찮아."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하다니.메이드는 뒀다 뭐에 쓸려고!" "...새벽인데..뭐...." 라고 대답해 버린 바보같은 나... "새벽...까지 뭘 한걸까~" 미야기의 놀리는 말투에 그만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마치 어제 서버 안의 나를 들킨듯..난 너무나 당황했다. 그 환상속에서도 창피를 당하다니... 현실은 더 최악이군..하필이면 그 앞에서... "...그만해...미야기.." 이안이 나를 놀리는 미야기를 나무랐다. 이런 맙소사...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는 그의 얼굴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지금...내 상태..최악인데... "..아..난...저기..아까..버그체킹하던게..남아서...그..그럼...먼저 들어갈게..." 이안에게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난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 녀석...아.사장님.무슨 문제죠?" "아이디 검색 말이야.될때가 있고,안될때가 있는거야?" "아..그거요?찾으려는 상대가 아이디와 위치를 보안으로 해놓으면 찾을 수 없어요." "..뭐야...쳇..." "왜요...누구라도 찍었습니까?왠일이실까~러브머신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재밌잖아." 아..누구나 저렇게 그저 재미로만 생각할 뿐인..러브머신 소프트웨어에... 현실에까지 이렇게 지배를 받다니... [어서오세요.진.오늘은 저녁 드시기로 하셨죠?] "...음..응...간단하게 해줘.배는 고프지 않아.점심을 늦게 먹었거든..." [예..그럴게요.] "아...루..감기약 좀 챙겨줘." [...열이 좀 높으시군요.오늘은 일찍 주무시도록 하세요.] "그럴게." 루와의 약속을 지킬 리가 없는 나.. 그나마 저녁은 먹었고,감기약을 먹은 뒤에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커피를 진하게 내렸다. 진한 커피향이 차가운 무기질의 내 방을 가득 메웠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소프트를 점검했다. 잠시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러브머신이 눈에 들어왔지만,고개를 돌렸다. 다시 접속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러브머신을 끼고 사이버 속에서 섹스나 즐기다가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역시..굶주렸었나... 한숨을 쉬다가 서버에 간단히 채팅 접속만 한 채 코딩을 살펴보기로 했다. 오른쪽 모니터에 수많은 숫자가 빠른 속도로 흘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벌써 30번째 같은 단어가 입력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접속자들의 검색창이 느려졌다. "..도대체...줄리엣을 찾는 로미오라도 된다는거야..." 투덜거리면서 누가 서버에 접속해서 이런 무식한 짓을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그쪽에서 단단히 보안망을 걸어둔 것인지 여간해서 뚫기가 힘들 것 같았다. 대신... 그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NAEJU]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에쥬..라고 발음했기 때문에 그 아이디를 찾고 있으리라... 아니..어쩌면 진짜로 나에쥬를 저렇게 쓰는 아이디가 존재할지도...... 들어가볼까...하다가,그냥 내 아이디를 감추는 보안만 해제했다. 해제하기가 무섭게... 채팅창에 메시지와 함께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제와 마찬가지의 얼굴... [왜 오프라인으로 접속한거야?] 그의 말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왔다. 난 마이크를 끄고,키보드를 두들겼다. [피곤해서...] [많이 피곤해?] [감기...그리고 마음의 병.] [마음의 병이라니?] [...그건 그렇고,NAEJ야 U는 빼줘.] [아..알았어..그런데!..어떻게 알았어!내가 그렇게 검색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다가 갑자기 소리치듯 물었다. 실수했다. 그걸 말하면 안되는 것인데...하지만,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그냥?...뭐야..치트키라도 있는건가...] 그는 이게 진짜 머그게임이라도 되는 듯이 치트키를 들먹였다. 어쩌면 프로그램 쪽에서는 전혀 문외한인 순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회사 안의 사무계 직원들을 떠올렸지만...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남자와 조금이라도 연결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에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쥬.정말 안 들어올거야?] [나 피곤해.감기 환자라고.] [흐응....] 시무룩해지는 그의 얼굴이 모니터에 가득해졌다. [내일 봐.] [내일은 일찍 올거지?] [글쎄...야근이 없다면...] [응!] 그가 손을 흔들면서 잘 자라고 인사했다. 미야기에게 오프라인 접속에서 약간의 로딩지연시간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 개발팀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난 걸음을 멈췄다. 미야기는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었고,그 누군가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가 한 눈에 알아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안...그가 미야기와 얘기하고 있었다. "아니~사장님...네트워크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익명이기 때문에 즐기는거라구요.그런데..그런 보안벽을 다 허물어뜨리다니...그건 사생활 침해에다가 정보통신법 위반입니다." "그런가..." "하여튼..못 말린다니까...전에는 뭘 개발하든 그렇게 신경을 안 쓰더니~" 미야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미야기는 자신이 짓고 있는 미묘한 웃음을 감추진 않았다. "그렇게 웃지마." "왜요~재밌는데...어쨌든...아이디 검색에서 로딩이 지연되는건 그만큼 접속자가 많다는 겁니다.어제는 좀 유난해서 폭주한 것 같아요...." "그럼,이 소프트가 시판된다면 더 심하게 되는 것 아니야?" "아.그건 걱정마세요.그때는 서버를 새로 개설할거니까.지금은 회사내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니까.그만큼 서버가 작아요.실제로 시판될 때는 서버를 이용할 이용자인증번호를 지급할테고...영어 외에 다른 언어들도 지원하니까." "음...통역서비스까지 할거야?그렇게 되면 용량이 커질텐데.." "아...그건 생각중이에요..안 그래도 보이스파일 때문에 용량문제로 조금 머리를 굴리고 있거든요..좋은 아이디어 나오게~회식비 좀 주세요!!!!!!!!!!!!!!!!!!!!!!!!" 미야기의 말에 갑자기 개발팀 전원이 달려들어서 사장을 뜯어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런걸 보고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섰다. 미야기의 말대로 이안은 다른때와는 달리 이 소프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사장으로써 개발팀이 전래에 없는 최고의 프로젝트라고 설쳐댄 만큼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그것만으로는 좀 미묘한 부분이 있는 소프트가 아니던가... 그동안 IM은 주로 보안망이나 OA,네트워크 서버를 위한 소프트를 개발해 왔다. 처음으로 섹스소프트웨어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만큼 시장의 폭이 넓어질 것이고,조만간 게임업계까지 노릴 수 있는 발판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역시나,이안 루의 야망이란 단순히 OA의 황제라는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소프트웨어의 모든 장르를 섭렵해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다. 쓴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섹스 소프트에 열을 올리면서 개발팀을 드나드는 젊은 사장이라... 저 외모에 저 능력에 주위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테고,조만간 유명인과의 스캔들을 터뜨리면서 결혼이라도 할만한 그가...러브머신을 끼고 산다는 것이 우스웠다. 이안 루도 인간인가...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이끌려가는 인간...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신성시 여기던 아이돌이 나와 마찬가지라는 것에 대한 실망감이... 기묘하게 엇갈렸다. "회식비 뜯어냈어.같이 가자.진~" 퇴근할 무렵이 되어서 미야기가 달려왔다. 물론,시스템체크팀과 개발팀은 한팀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가깝게 지내지만,회식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가자니까아~" "...감기야.집에가서 쉴거야." "진!!사회활동 좀 하고 살아!" "하고 있어.돈도 벌고 있고." 내 말에 미야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회식에는 안 끼지만 같이 나오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윗층에서 가득히 타고 내려온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문에다 얼굴을 대고 끼어 탔다. "...통역서비스까지 한다면서..." "어.미국내 시장만 노리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용량 커지잖아.어쩔셈이야?보이스 파일도 있고..." "델타에 맞춘거니까..디스크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조금 머리 아파...사실,통역서비스 그리 깊게 생각 안했거든.되면 되고,말면 말자..그런 주의였는데...오너가 새삼 물어보는 바람에...그야말로 절대절명의 프로젝트가 되어 버렸다니까." 미야기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의 말에 쿠쿡이며 웃었다. "서버에 직접 구축하면 되잖아." "...어?" "서버에.어차피 시판되면 디스크마다 인증번호가 지급될거고...인증번호를 입력하면서 서버 내의 통역서비스에 등록하게 하면 되지.무한의 서버에서 통역서비스로 차지할 영역이야 얼마나 되겠어?" "..그렇구나!!!아..하지만,그렇게 되면 서비스를 이용할 때 아이피를 추적당한다거나 하지 않을까...그렇게 되면 보안문제에 골머리를 앓게 될거야~~안돼에~~" "그게 편할껄.고객서버에서 직접 통역을 해서 전송한다면 로딩시간이 길어져.그렇게 되면 시판에도 문제가 될거야." "...으....머리아팟!!!!!!!" 미야기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 몸을 비틀었다. "보안은 하나만 하면 되잖아." "하나만이라니...너..사람들을 너무 얕잡아 보는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인증번호 말이야.인증번호로 아이피를 대신하는거지.일단 처음 접속할 때 인증번호를 입력하고,서버에서는 인증번호만으로 고객을 식별하고,접속시켜주게 하는거야.인증번호를 서버의 메모리에서 관리하게 될테니까.그러면 로딩시간에서도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고...또,서버 내에서 돌아다니는 고객을 인증번호로만 파악하게 되니까...아이피가 노출될 염려도 없지...^-^...굳이 인증번호를 추적해서 아이피를 알아내려고 해도...힘들껄.차라리 통계청을 해킹하지~" 그때 1층이라는 표시등이 켜지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난 가장 앞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내렸고,미야기가 뒤따라 내렸다. "진~~~역시...우리의 수석생~어째서 체크팀에 있는거야.이런 인재가!!!" "난 게을러서 날밤새는 개발팀에 있기 싫어." 농담삼아 말해주고는 막 도착한 버스로 뛰어갔다. "회식 잘해~" "진~~개발팀으로 끌어들일거야~~~" 미야기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진.어서오세요.오늘 기분 좋아보이네요.] "응...재미있었어." [진이 기분 좋다니 저도 좋아요.] 나의 메이드 루는 말 잘듣고 소녀다운 그런 메이드였다. 이 집에 입주당시 고객파일을 포맷하면서 약간 손을 봤었다. 기계에 열을 올리면서도 이상하게도 기계보다는 사람을 선호하는 나는...(과연 내성적인 이유는 뭘까..) 루의 시스템을 크랙킹해서 중고교시절부터 학부시절...나의 10년이 담겨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식시켰다. 1대1...문답법으로 감정을 이식시키는 일. 오래전 할아버지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20세기의 게임기에서 착안을 얻은 방법이었다. 컴퓨터속의 버츄얼 이미지에게 말을 가르치는 육성프로그램... 그 육성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실제로 이렇게 인공지능을 개발한 적이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 방법은 1900년대 말에 정부 차원에서 시행했던 프로젝트였다. 연구의 성과는 실로 대단했지만,너무 오랜시간이 걸렸고,입력자에 의해서 인공지능의 성격이 바뀐다는 것이... 까다로운 꼬마 키우기나 마찬가지였다. 난 되도록 내 성격을 배제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인공지능을 완성시켜가는 일에 착수했다. 그때의 메모나,관찰기록들이 내 하드를 가득체웠고,선반의 노트의 반이 넘어갔을 때...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미야기는 10년동안 이 일에 매달리는 나를 보고 집념이 지나쳐서 오타쿠라고 했다. 그거야 어찌되었든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집에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루가 잔소리를 할때는 귀찮지만 말이다. [진.식사에요.오늘도 서버에 접속하실 건가요?어제 열이 높게 올랐었어요.오늘은 일찍 주무시도록 하세요.] 이렇게 말이다. [진.식사는 남기시면 안돼요.쓰레기통에 몰래 버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역시나... 루는 저번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버렸던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드럽고 상냥하지만,무서운 누님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런 누님의 말을 들어야겠지만,난 다시 한번 서버에 접속하기로 했다. 오늘로 시스템 체킹을 끝내고,소프트웨어 자체를 미야기에게 가져다 줘버릴 생각이었다. 휘둘리고 싶지 않다. 실체가 나를 봐주지 않기 때문에 그 비슷한 웃음을 가진 버츄얼캐릭터에게 빠져 살다니... 욕구불만의 중년도 아니고,정말 꼴사납다. "나에쥬!!!"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큰 키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제발..조용히 말해주겠어?지금 볼륨을 크게 해놔서 귀가 아파." 시스템 체킹을 위해서 볼륨을 높이고 작은 버깅 소리까지 듣고 있던 나였기에 그가 조금만 큰소리로 말해도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렸다. "그럼 볼륨 줄이면 되잖아." "..안돼...체크해야해." 순간,또 실수... 이 남자만 만나게 되면 자꾸만 실수를 하게 되어버린다. 이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버츄얼 캐릭터만으로도 이모양이니,실체 앞에서 말을 버벅거리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하~~한가지 알아냈어.나에쥬.프로그래머구나.어느팀이지?" "...그건 개인생활이야." "이런이런..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설마 내가 찾아가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는거야?" "찾아올 수 없을껄.이 회사에서 일거리를 받아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총 몇 명일거라고 생각해?" "...설마.아르바이트가 회사서버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거야?" "...관례야.일시적인 계정을 내준다고...뭐야.그럼..그쪽은 아르바이트가 아니란 거겠네~" 아르바이트라고 둘러대면서 슬쩍 남자를 떠 보았다.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적어도 이 남자가 나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그는 확실히 사무계열이다. 전혀 마주칠 일이 없는 쪽이다. 간혹 우편물이나 인사이동 문제가 아니고서는 그들과 얼굴 볼 일이 없으니까... "자택 아르바이트야?" "응." "아~이런..낭패잖아...쳇..." 남자는 솔직하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독한 블론디 콤플렉스가 아니고서는 나에게 이렇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사장보다 더 하잖아... 버츄얼한테까지 매달리다니... 이건 염색한 금발이야~라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애시당초 이렇게 생겨먹질 않았다구..나는! 생각 같아서는 마구 쏘아대고 싶었지만,참았다. 아르바이트 생이라고 했으니...일찌감치 단념할 것이다. "그럼..지금 시스템 체킹하는거야?" "응...버깅소리를 듣기 위해서 볼륨을 높혔어...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이쯤에서...이 일은 끝내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하자 그가 내 팔을 세게 잡았다. "...응?" "내 아이디 안 물어볼거야?" "있잖아.금발머리에 대한 환상을 갖고...이런 사이버 안에서까지..집착하지 말아줘...당신 이 서버안에서 번디라고 소문이라도 날 작정이야?" 난 20세기 말,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발머리 연쇄살인범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말했다. "번디?" "그래.금발머리 도착증도 아니고...난 버츄얼캐릭터야.알겠어?실제로 사귈것처럼 말하지 말라고...난 기계를 다루는 일에는 익숙하지만,기계에 사용당해지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 그도...이 남자도... 어째서 그렇게 금발머리에 집착하는건지... 어머니가 어렸을때는 동양계가 인기가 대단했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데이트를 하려고 줄을 선 남자들이 대단했다고 하니... 이왕이면 일찍 태어날 것을... 아니다.. 애시당초 금발머리만 좋아하는 남자에게 반해버린 내 죄지... 우울해졌다. "...나에쥬.실제로도 금발머리구나?...혹시,금발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던가...어쨌든,금발이란 조금은 성적환상을 갖게 해주니까..." 그는 내 머리카락을 들어 입을 맞추면서 화가 난 나를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이젠 내 실체까지 멋대로 상상해 내는 남자를 보고 기가막혔다. "...마음대로 생각해..." 화가 나버려서 더 이상 그 방을 나오고 종료를 할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손을 뻗어서 코드를 뽑아 버렸다. 갑작스런 접속단절로 러브머신의 스피커가 울렸다. 끼익!!!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양귀로 크게 들은 나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컴퓨터에서 소프트를 꺼내고,그동안 버그체킹을 한 것과 간단한 개선사항들을 메모한 파일들을 저장한뒤에 책상위에 곱게 챙겨두었다. 내일 당장 미야기에게 갖다 주고 이 일에서는 손을 떼버릴테다!!라고 결심했다. "미야기..." "아~진~~어서와!!어서와!!!!^-^" 내가 개발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쌍수를 들면서 반기는 미야기를 보고...내 몸의 야생능력이 위험신호를 알렸다. 하지만,그런 신호를 미처 읽어들이지 못한 나는 미야기에게 이끌려서 개발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어~" "무슨...일이야?" 내가 미야기를 보고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짓자,미야기는 그저 씨익 웃고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통역서비스의 문제를 해결한 진을 소개합니다!!!" "미야기!!!!" "역시나...우리 학부시절...진을 따라올 머리가 없었지~그렇지?미키~" 미야기는 일년 후배인 미키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MIT 최고의 두뇌였지...현역시절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머리였다니까~" "그럴줄 알았어.게으른 미야기가 그런 걸 생각해 낼 리가 없어." "허~무슨 말씀을...게으르기로 치면...천재주제에 체크팀에서 노닥거리는 진이 더 하지!!" 미야기가 개발팀장인 라이라를 보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그건 그렇고,어서 이상황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이 소프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서버구축까지 맡으라니...말도 안돼!나는 체크만 할 뿐인데.... 미야기를 끌어당겨 뭐라고 말을 할 셈이었다. 그럴 셈이었다. 그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이쪽이 진?" 익숙한,그러면서 전신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야기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요.어때요?실리콘밸리의 이단아께선...이 MIT 이단아를 만난 소감이..." 미야기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난...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저기...내가 무지하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그럴리가...오넌데~진은 워낙에 낯가림이 심하니까...나도 2년이나 같은 클라스를 지내고서야 말을 걸 수 있었어요.처음부터 많은걸 바라면 안돼죠!" 미야기가 내 어깨를 잡아 그를 향해 돌려세우면서 말했다. "체크팀에 있었으면서...어째서...난 제대로 본 적 없는 것 같아." "불량 오너네~" "흐응~그런가..^_^아무튼..그건 반성할게.진.개발팀에서 일해줘." "....예?!!!!!!" 그동안 인사부장을 살살 달래면서 피해오던 일이... 그에 의해서 직접 내려지고 말았다. "...안해준다면 강제로 인사이동 시킬거야." 맙소사..이 남자..이런식으로 땡깡부리는 타입이었던건가! 대답없는 나에게 으름장을 놓듯이 말하는 그를 보고 기가막혔다. "하..하지만..전 시스템체킹팀이고..." "그동안 개발팀으로 가라는 말을 매번 보이콧 시켰다고 하던데...인사부장한테 다 들었어.내가 직접 나서겠다니까...다들 너무 좋아하더군...^_^그래서 이 오너가 총대를 매기로 했지." 그는 팔짱을 끼고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그래도...이렇게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그동안 각오를 했었어야지..아~진작에 내가 나섰어야 했어." 그의 말에 다들 웃었다. 그렇게...난..체크팀에서 쫓겨났다... 뭐 딱히 체크팀에 남아야 한다는 대의명분도 없었는데다가 그의 앞이라면 고개도 못 들고 버벅거리는 내가 뭘 했겠는가... 그날로 미야기와 개발팀이 체크팀으로 우루루 몰려와서는 나까지 박스에 싸서 옮겨갈 듯 법석을 떨었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에게 인사부장인 랙스가 다가왔다. "...하하..미안해.진...하지만,인재를 썩힐 수 없다구.그리고..이건 내 잘못만은 아니야." "...예?" "미야기하고 서버에 대해서 얘기했다며...퇴근길에..." "그런데요..." "낮말은 새가 듣고,밤말은 쥐가 듣는다.이 속담 알지?" 랙스는 아내가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가...그동안 나도 듣기 힘든 그런 속담을 써가면서 인사이동을 시키려고 했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 엘리베이터에 사장님이 있었다는거 몰랐지?그때 딱 찍힌거라고....^-^그러니까.나 원망하지마." 맙소사... 미야기가 머리를 쥐어뜯길래 해준 몇마디 때문에 생각조차 안 해본 인사이동을 하다니... 다음부터는 회사 내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테다...라는 뒤늦은 결심을 했다. [진...안색이 안 좋네요.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인사이동 당했어." [에..좌천이요?!] "나한테는 좌천이야.남들이 보면 승진이고..." [그런게 어디있어요?] "...개발팀으로 옮겨졌어." [...좌천이군요...안그래도 진은 몸이 약한데...개발팀에 들어가면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루는 다른의미에서 좌천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리고,루의 앞서가는 인공지능 덕에...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고칼로리의 식사를 받아야만 했다. [진!오늘부터 힘내세요.건강면은 루가 책임질게요!] 순간,검은색 메이드 스커트를 입은 곱슬머리 소녀가 주먹을 불끈쥐는 이미지를 상상해 버렸다. 풋..하고 웃어버리자 루가 기분 좋은 듯 말했다. [^-^ 즐겁게 일하세요.] "고마워...하지만,너무 고칼로리는 삼가줘...소화시키기도 힘들고...앉아만 있을텐데...이런걸 매일 먹었다간 한달안에 비만이 될거야." [진...진은 지금 체중미달이라는거 아세요?살 좀 찌우라고요.] "알았어..알았어..." 역시나 잔소리를 듣고는 출근을 했다. 데모버전에서의 그다지 큰 버그를 발견하지 못한 개발팀은 곧 출시일을 정했고,홍보팀이 몰려와서는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그날 오후에 소프트웨어 뉴스에서 이 메이킹바디에 대한 소개를 대대적으로 방송했다. "...자..드디어 저질러 버렸어!!오늘부터 일주일은 잠잘 생각들 말라고!" 라이라의 불타오르는 투지에 적응이 안되는 나는 여전히 시스템체크팀에서 길들인 게으름이 남아 있었다. 일은 후딱 끝내놓고,다른 생각이나 하면서 가끔씩 사장실에서 불쑥 나오는 그를 몰래 훔쳐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 남자에게 금발머리 도착증이라고 할 말은 못되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난 이안 루의 스토커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정시에 퇴근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루가 잔소리를 할테고... 그렇게 되면 난 아침마다 기름기가 흐르는 식사를 해야할지 몰르는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랜만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생존여부가 걸린 싸움 앞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리라... "...아~~진..어째서 이제야 개발팀으로 온거야~~이 일처리 속도...역시나..해커출신이야." "해커 출신이 아니라.이 녀석은 아직 해커에요." 미야기가 옆에서 끼어들면서 농담을 했다. "10명 몫은 충분히 해내는 인재라니...좋아좋아..^_^ 그동안 체크팀에 있었던 것 용서해줄게~" 루가 얌전한 누님이라면,라이라는 집안을 쥐락펴락하는 그런 누님이었다. "...정시 퇴근 가능하겠죠?" "진!!!!너..우리 팀장님을...얕잡아 보고 있구나..저 마녀를..." "..미야기.마녀?누가 마녀일까?" "하하...그..글쎄요." "진.무슨 일 있어?서버구축이 안되면 시판해도 소용이 없다구~~안돼에~~약속 취소해~~" 떼를 부리지만,라이라도 내가 이미 이틀정도는 잡아둔 스케쥴을 완성했기 때문에 가겠다고 나서면 붙잡을 맘은 없어 보였다. "이 녀석..집에가면 잔소리 심한 마누라가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일찍 보내지 않으면 내일 아침 배가 아프다고 난리를 칠거야." "마누라라니~~호오~" "메이드 말하는거에요." "메이드가 잔소리를 한단 말이야?" 라이라는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이었다. 난 그저 웃을 뿐이었는데,미야기가 말했다. "진의 메이드는 진이 만든 인공지능을 이식해서..잔소리가 아주 심하거든요.진네 집에 놀러갔다가...양말을 아무데나 벗어둔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무서웠다니까." 미야기의 너스레에 난 피식 웃어버렸고,라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공지능까지 손을 데다니이~진!!!정말이지..용서할 수 없어!" "예?" "그런 재능을 썩히면 안돼!!나중에 진의 메이드의 인공지능을 한번 보고 싶어..잘 하면..게임소프트 개발에서 선두에 설 수 있을거야.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던가..^-^" 아...맙소사. 루의 잔소리를 피해보겠다는 심산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러나,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인공지능은 놀랄만큼 발달했다. 간단한 대화가 가능해졌고,특히나 메이드 시스템에서는 고객파일에서 세부사항을 정해주면 눈치를 보는 메이드 시스템을 플레이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여전히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는 발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아직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했지만,여전히 인간이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수많은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고,개발하고 있지만... 그건 왠만한 재력과 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얘기였다. 사실,나도 학부시절에 전공은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다만,10년동안 그저 루의 인공지능 시스템에 열을 올렸을 뿐이다. 10년 노력이 헛것은 아니었는지,나는 가끔 루를 사람처럼 생각했고,루 역시 자신이 메이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곤 했다. "루.다녀왔어.내일 아침은 간단하게 해줘." [그럴게요.아참..목욕물 온도는 어떻게 할까요?] "저번처럼...왠일이야?미리 안 해놓고?" [깜빡했어요.] 인공지능이 깜빡했다는 말을 쓰다니... 너무 인간답게 키워 놓은게 아닌가 싶었다. 루의 시스템은 이 건물의 메인 메이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고,어느 한집에서 너무 많은 플레이를 시키면 다른 집의 메이드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 시스템 오류로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을 루는 자신의 실수나,건망증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것도...루의 지나친 인공지능일지도 모른다. 서버구축의 기본 틀이 잡혔고,세부사항을 점검하고,네트워크 접속시에 발생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내일이면 어느정도 완성이 되어서 회사내의 서버를 옮겨서 새 서버에 접속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안으로 데모버전의 모든 코드와 인증번호를 확인해 두어야만 한다. 나는 소프트를 플레이시키면서 오프라인으로 접속했다. [나에쥬!!!] 접속하자마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남자. 어제 하루 잊고 지냈더니...그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더구나 분명히 마지막 만났을 때 나는 화를 냈었는데... 이거야 원 루처럼 인공지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20세기에 유행했던 다마고치처럼 말이다. [어젠 일이 바빴어...당신은 한가한가 보네..매일같이 이 서버에서 사는거야?] [음...외로움을 타는 성격이라서....쿠쿡..]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나에쥬...오프라인으로만 접속할꺼야?러브머신 안 써?] [...별로 쓰고 싶지 않아.세일품목이라서 사긴 샀지만...이번에 이 일을 하게 되면서야 꺼낸거라고.] [...나에쥬...나 나에쥬랑 섹스하고 싶은데...] 잠시 저 남자에게 뭐라고 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리 섹스소프트웨어에서 만났다고는 하지만,저런식의 노골적인 말은 클럽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사귀던 사람들도 직접적으로 대놓고 같이 하고 싶다..라던가의 말은 하지 않았다. 빙글빙글 돌려서 얘기를 한다거나... 아니면 은근히 유혹을 한다거나... 그러다가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가 유혹을 한다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직접 말하는 것이 어울린다. [난 지금 할 생각 없어.감기 기운이 아직 남아있고,피곤해...일을 더맡게 되었어.] [나에쥬.혹시 가난한 고학생이야?아직 학생이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빚더미에 앉아있어서 말이야~] 농담으로 슬쩍 넘겨버리고는 그를 떠밀어 다른 아무방이나 보내놓고 일을 시작했다. 회사의 서버와 연결된 컴퓨터를 한 대 더 켜고,현재 접속중인 인증번호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난삼아 그 남자의 인증번호를 알아볼까..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디를 몰라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돌려야겠지만,어렵진 않을 것이다. 이 소프트는 데모 버전이고,서버는 한정되어 있는 회사내의 서버이니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다. 하지만,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내 자신을 알리기 싫어서 아이디를 감추고 있는데,남의 주소나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언제부터 이런 철학자가 되었던가...ㅋㅋ) "데모버전을 사용하고 있는 전 사원은 오늘 반드시 30초 이상 회사 서버에 접속해주시기 바랍니다..." 미야기가 공문을 읽으면서 씨익 웃었다. "왜 웃어?" "아니..모두에게 보내는 섹스파티의 초대장 같잖아.그렇지?" "...아..그래그래...그건 그렇고,가상 메모리는 확보한거야?" "어...메모리쪽은 이미 구축되어 있는 상태니까.아참...여기 패스워드." 미야기가 미니디스크를 건내면서 말했다. "덩치가 큰 패스워드로군.." "당연하지...서버라구..서버." "그래...알았어.오늘밤도 잠은 다 잤네..." "..진...적당히 하라구..." "적당히 하지 못하게 온갖 선전을 다하면서 이 일에 끌어들인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거야!" "아~그거야...그렇지만..난 진이랑 옆에서 일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은데~우리 공주님은 이렇게 뾰로퉁한 이유가 뭘까~" 미야기가 장난스럽게 내 목에 팔을 감고 뺨을 부벼대면서 말했다. "징그러워~" "어머낫~그런말을...우리 자긴말이야..옛날부터 너무 차가워~" "미야기.사내연애냐?" "...흐흐..짝사랑이죠.진은...너무 목석 같아서...흑흑.." "힘내라.미야기.솔직히 진이 아깝지만..." 라이라와 미야기의 농담을 들으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진.버츄얼캐릭터 어떤거야?" "어?..." "그러니까.어떻게 생겼냐구.이따가 가서 봐야지.자.아이디부터 불러봐." "오프라인 접속만 할거야.나한테는 이게 일이라구." "이런이런...놀면서 하자구." "...기계에 이용당하기 싫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평생 러브머신을 끼고 늙어죽을지도 몰라...생각만 해도 끔찍해." "...비약적이라니까..." 미야기와 헤어진 뒤에 버스에 올라탔다. 도로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버스안에서 창밖을 봤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없는데... 옛날 SF영화를 보면 2~30년만 지나면 인류는 기후까지 조절할 듯이 보였다. 비가 언제 오고 언제 그치는지 초까지 나눠서 알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할 듯 보였다. 차는 날아다니고,땅에 걸어다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 뿐... 그것이 오래전 인류가 그리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여전히 차는 도로위를 바퀴로 달리고 있다. 다만 석유가 고갈되어 전기나 메탄가스로 달리기도 한다. 요즘들어 메탄가스가 오존의 성질을 바꾼다는 학설 때문에 중화수소가 대두되긴 했지만... 여전히 수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지 고급 스포츠카나 레이스용 포뮬러가 아닌 이상에는 중화수소를 쓰는 차량은 많지 않다. 어렸을때,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수많은 얘기들. 병약해서 형들처럼 밖에서 뛰어노는게 쉽지 않았고,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힘들어 했던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오래된 게임기에서 움직이는 수퍼마리오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내 나이대 사람들 중에서는 그닥 많지 않으리라...(20세기 매니아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런저런 옛날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세 집에 도착했다. 비는 더 거세져 있었고,빠르게 뛰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진..많이 젖었네요.갑자기 왠 비람...] "일기예보가 틀릴때도 있는거야." [목욕물은 조금 뜨겁게 해놓았어요.] "고마워...루." [아참...진우씨에게서 전화 왔었어요.] "..그래?알았어..." 욕실에 들어가자 뜨겁게 해놓았다고 하더니...김이 가득했다. 그래도 찬 비를 맞아서 덜덜 떨고 있던 몸을 녹이기엔 좋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김이 좀 가시길 기다렸다가 전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뭐야..누구야.하나도 안 보이잖아....] 투덜거리는 목소리.진우삼촌의 아들인 슈도였다. 어렸을때는 일본민화에 나오는 미소년 슈도같이 예뻤는데,커가면서 진우삼촌을 닮더니... 지금은 액션영화에 출연해도 될만큼 덩치가 컸다. "슈도.나 진이야.지금 목욕중이라서 화면은 껐어." [이런~진~나를 유혹하는거야?] "...말을 말지..." [슈도!저리 비켜...진이냐?] 삼촌이 슈도를 발로 걷어차서 렌즈에서 밀어냈다. "무슨일이에요?란 삼촌에게 무슨 일 있어요?" [아..무슨 일은....] 진우삼촌이 얼버무리듯이 말했지만,그가 나에게 연락을 할때는 분명히 란 삼촌에게 일이 있을 때 뿐이었다. [..그게 말이지...회사에서 만드는 버츄얼 캐릭터 데모버전에...란을 이미지화 시켰거든..그래서 잔뜩 화가 났어.] "...아~전 신경 끌래요." [진!!!한번만 도와줘~~~란이 진짜 화났다구...이번엔 때리지도 않고 나가버렸어.] [아버지가 잘못한거잖아.어떻게 18금 게임의 버츄얼 캐릭터로 아빠를 그릴 수가 있어!!!난 아빠편이야.] 뒤에서 슈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란 삼촌은 어디에 있는데요?" [그쪽 갔을거야...그러니까.혹시라도 연락 오면...모르는척 하고..잘 잡아둬.알았지?내가 갈게.] "..그럴게요.아무튼..버츄얼 캐릭터는 빨리 삭제해요.나라도 그런건 화나니까." [응...그럼..진아.부탁한다.] [진아!!아버지 말 듣지마!!!!!] 슈도의 고함소리와 진우삼촌의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전화는 끊겼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진우삼촌은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란삼촌을 당황하게 하곤 했다. 연애시절엔 그것 때문에 많이 울었었다. 어린 내가 봐도 란삼촌이 불쌍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어머니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진우삼촌은 나에게 삼촌이라기 보다는 큰형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친형들이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집에 없었던 나에게 진우삼촌과 할아버지만이 친구였다. 진우삼촌 역시 아버지를 닮아 앞뒤 꽉막힌 보수적인 형들보다는 나를 더 좋아했고,내가 어머니의 어렸을 때 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사진을 보면..어머니는 꽤 미인인데... 난 전혀 안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슈도의 고교체전을 앞두고 란삼촌이 집을 나올 리가 없는데...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 연락을 해온다면 다행이지만,이대로 연락을 안하면...분명히 진우삼촌은 란삼촌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던가 별거선언을 들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자일 확률이 80%이다...) [나에쥬!오늘도 오프라인?] [응.] [너무 심한거 아니야?] [피곤해...] [왜?일이 그렇게 많아?아르바이트를 줄이라니까.] [이거 하나뿐이야.줄이면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힘들어?그냥 적당히 해.] [..당신이 다니는 회사야...그렇게 말을 하다니..불량사원이네.] [..쿠쿡...그런가..그래도 난 나에쥬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마이크라도 켜면 안돼?] [...나 지금부터 일해야해..얘기할 시간 없을거야...] [나에쥬우~~] [...왜.] [...물어보지 않아도..어쩔수 없지...휴우...일 다 끝나면 나 불러..] 그렇게 말한 그는 나의 메시지창으로 직접 메시지를 전달했다. [RUWIS] [루이?] [어~잘 아네.보통은 루이스..라고 물어보는데...] [난 누구랑은 달라서.] 그가 일전에 내 아이디를 잘못 찾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하자,그가 웃었다. [일 끝나면 불러.알았지?] [새벽에 끝나...아침이 될지도 모르고.] [기다릴거야.] [...한가하신 분이군요~] 그와의 대화를 접고,나는 일을 시작했다. 미야기가 준 미니디스크를 돌려서 패스워드를 입력하고,새로 구축된 서버의 메모리로 들어갔다. 수백개의 인증번호가 메모리를 장악해가고 있었다. 다들 퇴근했고,슬슬 저녁먹고 접속할 시간이 되어서이리라... 새로 메모리 서버를 구축한만큼 로딩시간이 좀더 짧아진 느낌이 들었다. 오프라인으로 접속했을 때 걸리는 로딩시간도 훨씬 단축되었다. 회사내의 테스트용 서버보다는 훨씬 낫겠지... 인증번호들을 보고 있다가 인증번호들의 규칙성을 발견했다. 한참을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던 나는 기가찼다. 미야기가 장난을 쳐 놓은 것이었다. 분명히 인증번호를 넣는 것은 미야기의 몫이었다고 들었다. 미야기는 인증번호를 여러개의 단위로 쪼개서 부서별,직급별,성별로 세세하게 나누고 있었다. 얼핏보면 두서없이 알파벳이 섞여 있었지만,확실하게 그 인증번호가 누구인지 대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프라인으로 접속했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오프라인 접속한거야?] "그래.너..인증번호에 장난을 쳤던데..." [아..알아냈어?] "사생활 침해야." [설마...그 많은 사람들..내가 다 어떻게 알거라구 그래...그냥 부서별로 나눠줄 때 편하라고 매긴 번호일 뿐이야.] "믿을걸 믿으라고 해." [...쿠쿡...별거 아니야...어차피 이건 데모버전이고...판매가 시작되면 지금의 규칙은 전혀 무용지물이 될거라구.고작 몇일 장난인데...뭘...] "다른 사람이 알면 그냥 안 둘걸." [...설마~^-^그것 때문에 화가 난거야?걱정하지마.난 진의 버츄얼이 어떤지 전혀 모르니까.그나저나 오프라인접속만 할거야?라이라가 술마시자고 기다리는데...라이라의 버츄얼 장난 아니야..와서 보라니까...] "...됐어..일이나 할래...금방 끝내고 잘거야...란삼촌한테 연락올지도 몰라." [에에...알았어...그럼...열심히 하세요오~] 나이트가운을 입은 미야기가 츄~를 날리면서 화면에서 사라졌다. 인증번호로 통역서비스가 가동되는지,버그는 없는지 이것저것을 체크하다가 보니까.벌써 새벽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대충 일을 끝내놓고 기지개를 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창을 열어서 [RUWIS]를 입력했다. 그는 아직 있었다. 클럽에서 술이라도 마시는건지..아니면 동료들과 당구를 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갈까..하다가...내가 일을 끝낼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에 미련을 걸면서 그에게 대화신청을 보냈다. [나에쥬~일 끝난거야?] [응...] [한잔하자.지금 동료들이랑 같이 있어.] [됐어.계속 놀아..나 지금 너무 피곤해...눈이 충혈됬어.] [...이런...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나에쥬도 졸업하고 여기 들어오면 좋잖아.] [..글쎄.생각해 보고...] [어어~IM은 취직희망1순위야...] [애사심이 대단하네..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내 말에 루이가 피식 웃었다. [그럼..나에쥬 잘자...굿나잇 키스 해주고 싶은데...] [됐어...그만하고 일찍 자...나야 아르바이트지만..정사원이잖아.그걸 잊지 말라고.애사심 많은 불량사원씨.] [쿠쿡..알았어.그럼...Good night,Sweety~] "홍보팀에서 이름 나왔는데..볼래?" 아침에 출근하니까.다들 모니터 하나를 둘러싸고 이래저래 말들이 많았다. "...유치하지 않아?" "글쎄..하지만,어차피 이쪽 소프트는 유치해야 잘 팔리잖아." "그렇긴 하지만..차라리..좀더 섹스어필한게 낫지 않을까.러브라니.." 미야기에게 끌려서 모니터를 보니 수십명의 얼굴이 그려진 바탕에 검은 테두리에 흰 글씨로 [VIRTUAL LOVE]라고 씌어 있었다. "디자인은 다시 한다고 하는데..아마도 이걸로 밀고 나갈지도 몰라." "눈에는 띄는데요." 내가 한마디 하자 다들 웃었다.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아.이미 예약주문만으로도 오더서버가 폭주할 지경이니까." 라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이 소프트웨어는 획기적이긴 했다. 단순한 섹스소프트웨어가 아니라,멀티 채팅이 가능했고,실제 인간과 안전하게 섹스 할 수 있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아마도 올해의 히트상품 목록에서 상위권에 랭크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 소프트 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이 뿌듯할만도 하지만,여전히...이쪽일엔 별로인지라 그닥 자랑하고 싶진 않았다. 러브머신도 반액세일이 아니었다면 살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담배를 사러간 미야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원벤치에 앉아 있었다. 눈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지만,머릿속은 복잡하게 엉키고 있었다. 통역서비스에서 버그가 잡혔기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오프라인에서는 제대로 가동되던 통역서비스가..확실히 보이스 파일과 맞물려 러브머신 접속에서는 버그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해결방안은 없나... 이럴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직접 러브머신으로 접속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담배 사왔어?" 난 당연히 미야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건 상대를 바라봤다. 누군가 공원의 환풍시설을 세게 높였는지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면서 그의 빛깔 좋은 머리칼을 바람에 쓸어 날렸다. "..아..사장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나는 벤치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덕에...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아..이런.괜찮아?" 그의 손이 내 팔을 잡고 일으켜 주려고 했다. 그런데,난 멍청하게도 그런 호의를 그가 닿는것만으로도 내 몸이 굳어버린다는 핑계로 쳐내고 말았다. "..아..죄송해요...괜찮습니다." 재빨리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그는 내가 쳐낸 손이 무안 한듯...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앞에서 이게 벌써 몇 번째 추태인지 모르겠다. 정말이지..좋은 이미지를 심어줘도 날 봐줄까 말까한 사람앞에서..아주 잘하는 짓이라고...스스로를 책망했다. 확실하게 존재를 각인시키는구나... 내 자신의 한심함에 감탄이 나올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거야?...아...일?" "..아..예..." "진이 개발팀에 가줘서 일의 진척이 빨라졌다고 라이라가 칭찬하던데...^-^" "..아.별로 한것도 없는데요..." "...그정도 일을 했으면 조금은 잘난척 해도 좋아.^_^" 그는 장난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나도 미야기처럼 유쾌하게 그의 이런 친근한 말투를 받아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미야기는 원래가 낙천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이고... 나는 낙천적이지도 않고,내성적인데다가...결정적으로 이 남자에게 반해있다. 절대 이루어질리 만무한 짝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보가 나다... 그러니..이쯤에서 도망치는 것이 내 심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저..그럼..전..일이 있어서요...." 목례를 하고 미야기가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공원에서 도망쳤다. 디버깅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고... 망할 머리는 어째서 이안의 앞에서 그런 바보짓을 했냐고 추궁하고 있었다. 미야기는 먼저 가버렸다고 투덜거렸고,사장과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다. 사장이 한 말로는 내가 개발팀에 간 것에 대단한 불만을 표시하는 것 같다고 했단다... 아.그런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구나.... "진.집에 안 갈거야?" "아...아니..좀 있다가." "그냥 집에 가서해." "아니야...이 컴퓨터로 접속해보려고...집에서는 버그를 찾지 못했어." "아..진..쉬엄쉬엄해...아..그리고..." 미야기는 나에게 잔소리를 하려다가 내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소근거렸다. 개발팀의 물품실에 보면 이 소프트를 개발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러브머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미야기!!!!!!!!" 미야기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돌아갔고,나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씹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대충의 버그를 잡아내고,시범삼아 통역서비스를 실행시켰다. 잘은 못하는 한국어를 써가면서 통역을 하고 있는데,의외로 잘 돌아가고,자연스러웠다. 보이스 파일에서 나와 톤이 비슷한 목소리를 골라서 음성으로 전환하자,실제로 내가 말하는 듯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성공이다...라는 생각에 길게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좋아져서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는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오래된 아이돌의 댄스음악을 좋아한다. 그 때문에 회식자리는 딱 질색인 사람이다... 유치한 가사를 한참 흥얼거리면서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흔들거리고 있을때,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으니 회사 안에 또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날밤을 샐 사람들은 개발팀 사람들 뿐이니... 그랬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란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놀란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고,그 때문에 문이 닫혀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잽싸게 누르는 그가 보였다. 다시 문이 스르릉 열리면서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진?" "...아...죄송해요...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아..잔업이 좀 남아서.불량오너란 소리를 안 들으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예?...아..예..." 개발팀은 32층에 있다. 지금은 27층...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가 말할때마다 이런 바보짓을 되풀이 할 생각을 하니..끔찍했다. "일은 어때?새벽까지 혼자 남아있고..다들 퇴근하고 혼자 남은거야?" "예..버그가 좀 잡혀서..." "미야기도 라이라도 진이 개발팀에 와줘서 마음이 놓인다고 해...나도 기분 좋고." "..예..." 나도 그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일얘기를 뺀다면 오너와 직원 사이에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는 최근에야 나라는 인간이 자신의 회사에 있다는 걸 안 것 같은데... (진작에 알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나를 인사이동시켰을 거란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워낙에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단,학부시절에는 존재감이 없다기 보다는 이목을 끄는 타입이었다... 물론,첫 중간고사 성적발표가 있은 뒤이긴 하다... 잠시 뇌를 뜯어서 보여준다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끔찍한 상상을 해버렸다. "..안녕히가세요." "버스 탈거지?" "예." "태워다줄게." "...예?!!!!" 바보같은 나는 아무도 없는 텅빈 로비에서 그야말로 고함을 치듯이 반문했다. 그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아..죄송합니다..." "뭘 그렇게 놀라?혹시 뭐 죄 지은거라도 있는거야?아까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렇고..." 이안은 조금 섭섭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아니요...원래..잘 놀라는 성격이라서..." 거짓말을 했다. 난 왠만해서는 잘 안 놀라기 때문에...할아버지나 진우삼촌을 나를 놀리려고 하다가 도리어 당하곤 했다. 하지만,100%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다. 이안에 대해서만은 잘 놀라니까. 그가 손을 내미는 것에도 흠칫하고,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이러다가 심장이 멈춰버리지 않을까 할정도로 놀라고. 지금은...태워다 준다는 말에 소리를 질러버린 것이다. "데려다 줄게.개발팀의 호프가 피곤하게 돌아가선 안돼지~" 그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고,나는 어쩔 수 없이...그를 따라 나갔다. 중화수소를 연료로 하는 이탈리아제 수공 스포츠카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내 머리를 비웃는 듯이 그의 차는 평범한 전기 자동차였다. "집이 어디지?여기서 짚어봐." 그는 차량용 보조 시뮬레이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미국 전역은 물론 전세계의 도로망이 입력되어 있는 시뮬레이터에서 내 집의 위치를 표시한 다음에 그에게 건내주었다. 시뮬레이터는 즉시 여러개의 도로를 선택해 주었고,가장 빠른 방법의 도로를 타고 그가 운전했다. 버스를 탈때와는 달리 가장 짧은 도로를 택해서일까... 처음보는 곳도 지나가면서 금새 도착했다. ".....감사했습니다....." "아니..뭐...오랜만에 드라이브 하고...야근할때는 말해.데려다 줄게." "예?!!...아..아닙니다...그럼.안녕히가세요." 차에서 내리고,그의 차가 골목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차안에서 그는 요즘 소프트 업계가 이렇다..저렇다..라는 얘기를 했지만,길게 얘기하진 않았다. 내가 제때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화는 막혀 있었고,나도 그도 서로의 눈치만 보는 듯 했다. 다시는 그와 단 둘이 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 자신이 이러니,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끔찍했다. [진.늦었네요.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아.루.미안..야근이 있었어.저녁은 먹었으니까.괜찮아...간단하게 샤워만 할 수 있도록 해줄래?" [예.그럴게요.] 세차게 내리꽂히는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 서서 스스로에게 오늘 얼마나 바보같고 한심했는지를 자책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비단 오늘뿐은 아니었다. 나는 이안 루...그의 앞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인간인 적이 없을 것이다. 왠지 생각할수록 더 비참해졌다. 서버쪽의 문제에 열을 올리면서 나는 소프트 자체는 거의 잊고 지냈다. 서버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미야기와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힘을 쓰면서 시간이 지나갔다.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이안의 일도 잊을 수 있었고,무엇보다 개발팀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안을 보면서 점점 적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기특했다. 이제는 그가 말을 걸어와도 더듬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하는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여전히 긴 대화는 무리였다.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가볍게 목례만 했고, 말을 걸어와도 예/아니오로 짧게 대답했다. 그런 내 자신에 적응이 되어가고, 그의 앞에서 절대 떨지 않는다!!라고 자신하게 되었을 때... 미야기가 말했다. "진.아직도 오너가 개발팀에 보내서 화가 난거야?" "무슨 소리야?그게 언제 얘긴데..벌써 일주일이 넘었잖아.." "..그럼...낯가림인가..." 미야기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중얼거렸다. "왜?" "아니...오너도 라이라도 진이 오너를 싫어하는게 아니냐고 해서 말이야...사실 내가 보기에도 넌 오너에게만은 좀 유별나게 차갑게 군다고.예.아니오로만 대답하고..눈이 마주쳐도 웃어주지도 않고...뭐..나야 너 그러는거 하루이틀이 아니란거 알지만...오너가 그렇게나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데..좀 봐서라도 말도 걸고 그래봐." 미야기는 싸우고 삐진 아이 달래는 선생님처럼 말했다. 내 딴에는 이안 그 앞에서 제정신으로 버틸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낯가림 심한거 알잖아." "나야 알지만...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오너는 너한테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구." 내가 반한 남자 앞에서 바보 같은짓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랬더니..이제는 자신이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을 해버리다니... 정말이지 나라는 인간의 어쩔수 없는 사교성에 다시 한번 탄복해야만 했다. "루.다녀왔어." [진.오늘 힘이 없어 보이네요.회사에서 일 때문에 스트레스 주는거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야...내 자신의 사교성에 대해서 새삼 깨달았어." [진의 사교성이 어때서요.누가 뭐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루는 달려나가서 누가 우리 아일 울렸어!!라고 화라도 낼 것 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냈다. "쿠쿡..그런거 아니야.낯가림이 심하니까..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지..뭐...그건 그렇고..루.배가 고파.간단하게 샌드위치 좀 만들어 줘." [왠일이에요?진이 먼저 저녁을 먹겠다고 한게 얼마만일까~]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까지 따라서 흥얼거리면서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주방시스템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루는 메이드 시스템이라고 하기엔 너무 사람 같다. 서버의 최종점검! 이라고 외치지만,실상은 외로움을 탔다고 해야할까. 나는 러브머신에 누워서 접속을 시도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해받고 있다는 것... 그의 안중에도 들어가지 못할 내가 이제는 오해까지 받아버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를 닮은 버츄얼 캐릭터에게 위안이라도 받아볼까...하는 셈으로 접속을 했는데... 접속하기가 무섭게.. 어서오십시오라는 소프트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루이가 소리를 질렀다. "나에쥬!!!!!!!!!게임방에 있어!!빨리 와!!!!!" "....아..알았어..." 그를 처음 만났던 게임방에 들어가자 그는 칵테일 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양손을 들고 흔들어대는 통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내 얼굴이 아님에도...창피한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그만 흔들어.애도 아니고..." "도대체~근 열흘이 다되도록 왜 안 들어온거야~진짜로 아르바이트가 끝나버린줄 알았어!" "끝났어." "진짜야?" "응." "나에쥬..이 소프트 살거지?" "...별로 살 생각 없어." "그럼...이제 못 만나는거야?이 소프트 내일부터 출시에 들어가는데!!!" 루이는 절대 안된다는 투로 마구 떼를 썼다. 이런 남자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한 내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쥬.이 소프트 사지 않을거라면...내가 선물해도 되?" "뭐어?!!" 이 기막힌 말을 하는 남자를 보고 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듯이,루이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난 나에쥬와 계속 만나고 싶어." "어쩌다가 당신 이상형에 들어맞는 버츄얼을 뒤집어 쓰게 된 것 뿐이야...심각하게 나오지 말라고...난 러브머신을 끌어안고 사는건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좀더 친해지면,실제로 만날수도 있잖아." "그럴일은 절대 없을걸.블론디 콤플렉스 양반~" 실제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밝히는 루이가 귀엽게 여겨졌다면... 나도 이미 러브머신을 끌어안고 늙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까. "난 이렇게 나에쥬에게 빠져있는데...나도 바쁜 사람이라구.혹시라도 나에쥬가 들어오지 않을까..싶어서 매일같이 서버에 들어오는건데...무심하기도 해라~" 장난스럽게 우는 시늉까지 하는 그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졌다. 실재하는 내가 아니지만,성격이나 목소리는 나이기 때문에... 비록 그가 겉모습에 홀딱 반했다고는 하지만,나를 찾고 있었다는 말에 좋아지는건 당연한게 아닐까. 조금은 솔직해져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루이가 하는 것을 봐서~살지 안살지 결정할거야." "진짜?좋아~나 잘할게.나에쥬가 날 좋아하게 할 자신 있어!" 처음 봤을때의 루이는 잘 가꿔진 섹시가이에다가 연애시뮬레이션의 완벽한 카사노바형이었다. 적당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겸비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어린아이 같은 투정도 부릴 줄 아는..사랑받는 것에 도가 텄다고나 할까...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지금은... 이 남자는 아이같다. 카사노바라고 하기엔 순진하게 이상형인 버츄얼 캐릭터에게 이렇게까지 열심히라니... 혹시라도 아직 10대의 정신연령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에서 자리를 옮겨서 푹신한 소파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그저 세간의 소문 같은 것을 얘기하면서 진짜 데이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루이는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끌어안은체로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이번 크리스마스에 집에 내려갈거야?" "모르겠어.간다고 해도 반겨줄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그냥 가까운 삼촌 집에나 들릴까...해." "그럼..크리스마스에 나랑 놀자.분명히 서버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이벤트를 할거야.그치?" "...노는 것밖에 생각 안하다니...사회인이 그래도 되는거야?" "하지만,난 나에쥬와 크리스마스에 같이 있고 싶어." 그가 머리카락에서 얼굴을 들고는 뺨에 입을 맞췄다. 뺨에서 시작한 키스는 점점 입술에 가까워져 왔고,곧 진한 키스가 오고갔다. "...그만 좀 하세요.우리 왔다구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놀라서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새빨간 머리의 나긋나긋해 보이는 소년같은 남자와 검은 머리칼을 풀어헤친 가슴 큰 여자가 서 있었다. "아..왔어?라이라..오늘은 더 커진 것 같아...버겁지 않아?실체와의 괴리감이 너무 커서 적응이 안돼." 루이가 여자를 보면서 하는 말에 난 순간 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이 여자 버츄얼...개발팀 팀장 라이라는 아니겠지...라고 수도없이 속으로 빌었지만... 상황은 더 심각했다. "그렇지.미야기도 그런 얼굴이잖아~" 빨간 머리는 미야기였던 것이다. "흥~무슨 말씀을...솔직하게 제가 섹시해 보인다고 말해주시죠." "알았어..알았어...그나저나 아이디 또 바꾼거야?" "마음에 안 들어서요.어제 만난 남자가 자기가 키우는 페트로보와 이름이 같다고 하는 바람에 화가 났거든요." 그녀는 공중에 작은 창을 하나 띄워서는 남자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루이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러게...어쩌자고 버츄얼 캐릭터한테 유명한 게임주인공 이름을 붙여요...오타쿠 같은 남자들은 페트로보에 그런 이름 많이 붙인다니까..." 미야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잠시 이 둘과 루이의 대화를 들으면서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이미 라이라와 미야기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면 다음 상황은 이 루이라는 남자인데... 미야기의 인간관계란 때론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넓어서... 우편배달을 온 택배회사 직원에게까지 가정사를 물어볼 정도였다... 미야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 회사... 머릿속에서 그간 미야기가 아는척을 했던 숱한 인물들의 얼굴이 검색파일처럼 재빠르게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소개 안 해줄거에요?" 미야기는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에쥬...^_^...정체를 알수 없는 아르바이트지." "아르바이트!" 미야기가 반갑게 웃었고,나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회사 들어올거에요?오너는 좀 안 좋지만 좋은 회산데에~" 미야기의 말에 나는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에쥬는 별 생각 없어.우리회사 글쎄~라고 생각한다니까..." "좋은 생각이야.오너가 별로거든~" 미야기는 연신 농담을 했고,다들 키득거렸다. "그럼...두 사람 다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그러죠~데이트 잘 하세요~" 미야기가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미야기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무슨 핑계를 대고 물어보랴... 그냥 궁금해도 참는 수 밖에 없었다. "회사 동료?" "응...개발팀이야..이 소프트 만든 작자들이지~" "...아..." "나에쥬.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오면 저 사람들이랑 일하게 될거야...재밌을거 같지 않아?" "...아니..별로.난 공무원이 되는게 꿈이니까." "IM의 아르바이트를 맡을 정도의 실력자가 왠 공무원이야?야심이 없는거 아니야?" "...안정하고 싶으니까...이리저리 옮겨다니고,일에 치이고,결국엔 40이 훌쩍 넘어서 그동안 무얼 했나..라고 후회하면서 집구석에 쌓인 골프채나 휘두르는 인생은 싫어." "..신랄하잖아..." 루이는 그렇게 말하고,내 입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등으로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특별셋팅..." 방안을 보고 기가막혔다. 붉은 벨벳 침대에 방 전체가 아라비아 할렘을 연상시키는 그런 분위기였다. 횟불에 향유냄새까지 진동을 했다. "소프트가 시판되면 테마파크처럼 이용될 그런 거거든?내일부터는 유료니까...공짜일 때 들어와야지." 루이는 갑자기 나를 안아들면서 말했다. 웃음이 나왔다. 전체요리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내놓기 전에 아깝다는 식으로 조금 떼어서 맛을 보는... 심술궂은 웨이터의 심리일까... "기분 좋아?" 내가 웃자,그는 좋아 하면서 물었다. "재밌어...어린아이 같잖아..처음엔 전혀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럼 어떻게 봤는데?" "...음...연애시뮬레이션의 카사노바." "카사노바라니..." "완벽해 보였다고 할까...사람같지 않은 인공지능인줄 알았어... 그는 완벽하다는 말에 좋아하다가 인공지능이라는 말에 짓궂게 목을 물어왔다. "하아...쿠쿡..하지마..간지러워." "나에쥬...이래도 내가 인공지능이야?" "그럴리가...인공지능이 이럴 리가 없지.인공지능은 점잖거든.어른이야.당신은 어린아이고..." 짐짓 진지하게 놀려주었고,그는 날 간지럽혔다. 실제의 생활이었다면 난 즐거운 연애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농담을 하고,장난을 치고,키스를 하고,그리고 섹스를 하는... 얘기하고,같이 술을 마시고... 아주 평범한... 섹스소프트웨어의 의례적인 데이트코스가 아닌,진짜 사람과의 대화... 아무리 내성적이라고는 하지만,요즘들어 핀치에 몰렸다고나 할까...외로움이 극에 달했던 나는 사람이 그리웠다. "...하아....조..조금만 천천히 해..당신은 너무 빨라..." "날 너무 굶겨뒀다구..." "내가 먹이야?..." "나에쥬....보고싶었어..." 내가 아닌 나를 그리워했다는 남자...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게 젖어드는 기분에...나 역시 취해 버렸다. 진한 칵테일과도 같다. 현실의 쓴맛과 환상이 주는 단맛... 이것이 바로 VIRTUAL LOVE... "..하악...." 입술을 깨문 잇새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밀고 들어오는 루이... 그렇게나 천천히 하라고 애원을 했건만...그저 보고싶었어...한마디로 사람을 무너뜨려 버린다. "...루이...아파..조금만 천천히 해......" "..나에쥬..미안...." 그가 귓불과 턱선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내가 조금 편해지게 하기 위해 진한 키스를 하면서 그는 끝까지 밀고 들어왔고,그제서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가 무섭게 루이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하아......루이..." 그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루이는 등허리에 팔을 넣어 안아주었다. "나에쥬...이름 더 불러줘." "...루이....루이!!!...하악...." 그와 동시에 절정에 다다랐고,내 몸 안에 역시나 뜨끈한 이온액체가 방사되었다. 섹스 후의 나른함이 온 몸을 휘감았고,그의 따뜻한 팔 안에 안겨 있지만... 잠시 후에 다가올 젤리의 찝찝함에 대한 경고를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나에쥬.자고가자." "싫어...말했잖아..젤리..." "내가 빼줄게...응?" "말도 안돼는 소리..." "조금만 참으면 안돼?" "...직접 겪어보고 그런 말을 해..." 난 그의 말을 일축시키면서 몸을 일으켰다. 루이는 입을 이리저리 삐죽이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대신..이 소프트웨어..내일 살게.됐지?" "진짜?" "그래...당신이 원하는 이 모습 그대로~다시 나타날테니까..조르지마." "나에쥬...그런말이 아니잖아..." "됐어...그만 일어나...내일부터 새손님들이 들어올 유료방에서 공짜로 오래 있는건 안 좋아..." "뭐~닳는것도 아니고 말이야..." 루이는 키득거리면서 옷을 입는 나를 처음처럼 도와주었다. "오랜만에..굿나잇 키스..." 장난스러운 얼굴이 조금 진지해지면서 키스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을 하니,아니나 다를까..주문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폭주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살 것이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사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닐꺼야..." "그렇다고 사원전용으로 따로 팔 여력이 있는것도 아닌데요?" "그럼...어쩐다...아~인기 많은 소프트도 머리 아프게 하는구나..." 라이라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어서와.뉴스 봤어?백화점에 줄까지 섰어...장난 아니야.택배회사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니까." "...아..응..오다가 봤어." "데모버전으로 실컷 놀던 우리가 이제부터 당분간..금욕생활에 들어가야 한다니까..다들 불만이야." 미야기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었다. 그동안 데모버전으로 실컷 즐겼으니,갑자기 소프트를 구하지 못하게 되어 접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만이 될 만 했다. "...서버 메모리 삭제했어?" "아니..왜?" "삭제하지 않았다면,그 인증번호를 그대로 쓰게 하면 되잖아.대신 접속 전에 소프트웨어의 값을 지불하고,인증번호를 다시 받는거지...그러면 데모버전으로도 접속이 가능할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주고 자리에 앉았다. "진~~역시..우리의 호프야~" "하지만,데모버전이니까..같은 가격을 매긴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보이스 파일도 없고..." "가격은 사원전용으로 할인을 해주는걸로 하죠.대부분 자사 제품을 구입하는 사원에게 주는 그런 혜택 있잖아요." 라이라의 말에 내가 이전 OA 제품 구입에서 20% 할인을 해줬던 일을 얘기하자,손뼉을 쳤다. "그렇구나!!기다려!허가 받아올테니까!" "아.라이라.보이스파일은 복사해서 메일로 보내주는 형식으로 해서 가격을 따로 매기세요." "역시~진..고마워~~~" 라이라는 총알같이 뛰어나갔고,미야기가 나를 물끄러미 봤다. "왜?" "진..너도 실은 이 소프트가 마음에 드는거지?그렇지?" "...그래.됐냐?" "응^-^..." 미야기는 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서 기뻐했고,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내 의견이 상부에서 통과되어서,사원들은 서둘러 입금을 시작했고,그덕에 오늘 하루 회사의 매출액은 전년도 히트상품인 OA소프트웨어의 출시당일 매출액의 두배를 넘어섰다. "진!아침에 라이라가 가져온 의견 좋았어.경영일선에서도 뛰어보는거 어때?" 개발팀에 온 이안이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면서 칭찬했다. "...뭘요.그냥,다들 새로 사야한다는 것이 불만인 것 같아서 한 얘긴데요.뭐..." 나는 슬쩍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너인 그가 고작 프로그래머인 나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둥의 말을 하게 한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볼때마다 자동적으로 굳어지는 안면근육을 열심히 펴가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나를 보고 이안은 잠시 놀란 얼굴이다가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환하게 말했다. "아니야...진은 역시 대단해." "감사합니다." 미키가 서버의 문제로 나를 찾는 바람에 이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미키와 이것저것 서버의 문제를 수정하고 있는데... 음료수를 갖고 온 미야기와 그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너.진의 아이디어에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아침에 뉴스보고...앞으로 열흘간은 소프트웨어 사는 일에 줄을 서야겠구나...하고 생각했거든." "밝힘증 환자같으니!" "그러는 미야기도 하루도 안 빠지고 접속한 사람 아니던가~" "전 제가 만든 소프트의 진가를 시험하는 겁니다.일이라구요.누구와는 달라요...블론디 콤플렉스~" 미야기의 말에 순간 놀랐다. ...블론디 콤플렉스야 한둘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적인 환상을 갖게 하는 블론디의 매력이란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어째서 이안과 루이의 얼굴이 겹쳐졌는지...조금 마음이 쓰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나를 좋아해주는 버츄얼 캐릭터.. 두 사람 모두 금발에 목을 메는 타입이라니...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거다. 이안의 블론디 콤플렉스야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이고... 나의 버츄얼 이미지를 만들때..사실 이안의 이상형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했던 부분을 이미지화 시킨것이니... 새삼 놀랄 것이 못되는 일이었다. 그저,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에 금발의 버츄얼을 만들어 내는 내 자신의 유치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수밖에... "진 선배...오늘 서버 엄청 폭주하겠죠?지금 팔려나간 소프트웨어 수만해도 엄청난데..." "그렇겠지...비상등을 켜두고 자야할 것 같아..." "그러게요...아~잘 팔려도 피곤하구나..그래도 진 선배가 서버일을 해주니까..그나마 안심이네요." "...나만 믿지말라구..난 초인이 아니야." "알아요.알아~" 미키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와 서버와 소프트의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을 때... 미야기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고,내 뒷통수를 후려쳤다. "어제..그 버츄얼...보기만 해도 감이 왔다니까요.완전히 이상형이잖아...도대체가 네트워크 안에서까지 금발에 매달릴건 또 뭐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소리 들었어.나더러 번디래." "캬하하하!!잘 어울려요.번디~" 맙소사... "선배?" 난 지금 너무 놀라서 주저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번디...그건 내가 한 말이었다. 그 남자..루이에게... ...그럼...그 루이가 이안이었단 말인가? 치트키라는 둥...프로그램에는 문외한인 듯 말하더니... 기가찼다. 내가 실제로 반한 남자와,그 남자에게서 받지 못할 사랑을 주고 있는 서버 안의 버츄얼이 동일 인물이라니...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차라리 몰랐었다면 괜찮을 것을... 난 지금 웃어야 하는 걸까... 기가막혀 울어야 하는 걸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선배!!!!" "..아..미안..뭐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미안...뭐라고 했지?" "별거 아니에요...왜 그래요?무슨 문제라도 발견한거에요?" 미키의 불안한 말에 미야기와 이안이 다가왔다. "진..왜 그래?무슨 문제 있어?" "어?...아..아니..아무것도..." 아까의 능수능란한 대화법은 까맣게 잊어버렸고,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시선을 피했다. 또 다시 버벅거림이 온 몸을 지배했다. "..진?" "...예?...아...아니요.문제는 없습니다...괜찮아요......아..저기...나..잠깐..바람 좀 쐬고 올게..." 난 무슨 정신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정신이 어느정도 들었을때는 공원에 앉아서 환풍기의 바람을 맞으면서 앉아 있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또 어디에 있을까. 아니다. 내가 바보였고,내가 둔했다. 애시당초 그의 웃음이 이안과 닮았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이야 당연한게 아닐까. 그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면서 그가 원하는 이상형을 만들어낸 것도 나였다. 그가 좋아하는 이미지만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버츄얼을 뒤집어 쓰고 서버에 접속한 것이 나였다. 이제와서 한탄하고 후회한들 소용이 없는 일인 것이다. 지독한 블론디 매니아에게 반해버린 내가 잘못인거다... 한숨이 나오고...쓴웃음이 나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자신이 이렇게 바보같이 될줄은 상상도 안해 봤다. 그런데 지금은 내 자신이 싫어질 정도로 그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자기비하와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어가면서까지...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바보같은 사랑을 하는 나에게...조소와 위로를 던지는 바이다. [진.어서오세요.저녁은요?] "점심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목욕만 할게." [그렇게 하세요..진?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괜찮으세요?] "...괜찮아...회사에서 조금 놀라서 그래...지금은 괜찮아.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편히 쉬세요.] "고마워.루..." 목욕을 하고 나와서 러브머신 앞에서 망설였다. 상부에서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나 역시 데모버전의 인증번호를 사용하기 위해서 입금을 한 상태였다. 입금을 하기 전에 루이가 이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러브머신 앞에서 망설일 이유따윈 없었겠지. 버츄얼을 뒤집어쓰고서라도 사랑받고 싶은걸까? 그건 내가 아닌데도? 내가 만들어낸 그 이안 루-단 한사람을 위한 이상형인데도? 네트워크 상의 연애가 아니다. 루이가 18금 연애 시뮬레이션의 완벽한 캐릭터라고 했던 것이... 오히려 내가 이안 루를 위한 연애 시뮬레이션의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그는 금발의 요정같은 사람을 좋아했고,그런 사람과 만나길 바랬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길 원했고,버츄얼로 만난 이상형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그가 갖고 있는 연애에 대한 이상을 충족시켜주는 버츄얼 아이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진...이 아닌...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 이름조차 거꾸로 뒤집힌... 나에쥬로써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거야...여전히 불성실~" 루이의 말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방안의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돌아가려고?" "..응?..응...시간 늦었어.돌아가 봐야 하는거 아니야?지각하면 안돼잖아?불량사원씨." "음...그런가.." "그럼~" "그건 그렇고..용케도 소프트를 샀네...주문 폭주했다고 하던데." "왜 백화점 앞에서 줄서있었을 것 같아?" "아니...그럴 것 같지 않으니까 궁금하지.혹시..미리 예약주문 해놨던 거 아니야?" "글세..."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잠그면서 그를 봤다. "나에쥬." "응?" "내일도 올거지?" "...응..." 내 대답에 그는 내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이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지금 나에게 키스하고,내 머리칼에 취한 듯이 입을 맞추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가 내가 아닌 버츄얼 나에쥬를 안고 있다는 것... 내가 이 버츄얼이 아닌 그 본체를 사랑한다는 것... 마음이 아파왔다. "그만...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미스터 신데렐라." 장난스럽게 말하고 그를 밀어냈다. 그는 아쉽다는 얼굴이었고,난 그의 얼굴에 슬쩍 웃음을 보여주고 돌아섰다. 하루하루,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낮과 밤의 전혀 다른 가면을 쓴 생활이 계속되었다. 밤에는 그와 함께 지낸다. 스스로 버츄얼 캐릭터에 빠진 한심한 인생따위는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말대로만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밤에 만나는 루이 때문에 낮에는 더더욱 이안을 피하고 있었다. 다들 나의 낯가림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게 되었는지 별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미야기는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뭐야..하루정도 잘 지내는가 싶더니...진!!!" "미안..어쩔수 없다는거 알잖아...하루이틀 습관이 아니라..천성이 이 모양인걸 어떻게 해?" "못말려..진짜..." "미안." "됐다~다들 너 그런거 다 알고..이젠 포기해버렸으니까...뭐~나야 우리 자기가 사교성이 나빠서 독점할 수 있어서 좋지만 말이야~~" 미야기가 뺨을 부벼대면서 들러붙어 말했다. "저리 좀 떨어지라니까~" "무심한 당신이야~진짜~~" "얼씨구...이봐.사내연애커플...때와 장소를 가려주시죠." 라이라와 이안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난 좀 당황해서 미야기를 떼어내려고 했지만,미야기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어깨에 턱을 괴고 장난을 쳤다. "부러우면 솔직하게 얘기하세요~라이라~" "시끄러워~" 이안과 눈이 마주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그 때문에 굳어버린 내 얼굴에 그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다...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그와의 사이에(사이라고 해봤자,오너와 직원일 뿐이다.) 완벽한 담을 쳐 버린 것이다. 조금 씁쓸했다. "둘이 사귀는거야?" "오너~몰랐단 말입니까?나와 진의 뜨거운 사랑을?" "미야기!!!" "하하..농담이에요...농담...진이 시무룩해 있길래 장난 좀 치는거니까." 미야기는 변죽좋게 웃으면서 이안을 봤다. 난 그를 피하듯이 몸을 움직여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뒷통수에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무시했다. [어서오십시오.나에쥬님.루이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안내데스크의 여자가 메시지를 건냈다. [테마파크로 와.] 간단한 그의 메시지를 접고,테마파크로 향했다. 테마파크는 처음에는 가격이 낮았지만,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가격이 높아졌다. 서버 내에서 테마파크의 티켓이 암암리에 더 비싼값에 팔린다는 소문도 들었다. 미야기와 미키는 잡아내서 그냥 안두겠다고 난리를 쳤지만,라이라는 이럴줄 알았으면 1순위로 티켓을 사두었다가 팔 것을 그랬다며 후회했다. "...왠 다도?" 오리지날 이미지가 약간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기모노를 차려입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가자 진한 차향이 진동을 했다. 그가 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기모노를 차려입은 모습이 옛날 일본 영화에 나오는 사무라이 같았다. "어라.옷은?" "별말 없었잖아.어떤 테마인지도 말도 안해서..아이디를 검색해서 찾아온거야." "아..그랬나..미안...밖에..여기 옷 좀 준비해줘." "됐어..나까지 그 차림을 하라고?" "응..재밌잖아." "퍽이나..."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도 귀찮았고,문제는 이 금발머리가 과연 어울리겠냐...는 것이었다. "나에쥬...잘 어울리는데?그래도 역시...다음번에는 베르사이유로 해야겠어." "...맙소사..이번으로 그만둬줘..알았지?" "재미없어?" "별로야." 나의 딱 자르는 말투에 그는 약간 시무룩해 하다가 금새 웃으면서 차를 냈다. "어때?차맛이..진짜같지 않아?" "음...그렇네...차를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나에쥬..차는 몸에 좋아.커피를 마실거면 차를 마시도록 해." "커피도 잘 안 마셔..." "그럼?설마..물만?" "대충..물 아니면 이온음료." "...이온액체는 싫다면서~" 그의 농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농담이야..농담..화났어?" "아니야.좋아.내가 이온액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주지..." 오히려 그를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에쥬...하아...좋아..." 나는 찻상을 치워버리고,루이에게 가서 안겼다. 내가 먼저 키스를 하면서 그의 기모노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오는 나를 안아들어 요가 깔린 옆방으로 들어갔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당연하지..." 그가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요 위에 내려놓았고,나는 앉아 있는 그를 쓸어뜨려서 그 위로 올라갔다. 그의 단단한 가슴과 복부를 손으로 입으로 쓸어내렸다. 버츄얼이 아닌...이안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난 대담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를 쾌락으로 몰고갔다. 처음 루이와 잤던 날,루이가 말했던 것처럼 요부기질이 있는 것일까...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바지를 풀어내리고 그의 부풀어있는 페니스를 입안 가득 물었다. 살짝 이를 세워 그의 것을 더더욱 긴장시키면서 귀두끝을 혀로 희롱했다. 입안으로 뜨끈한 이온액체가 흘러들어왔다. 타액과 거의 비슷한 느낌..조금 다르다면 좀더 끈적임이 있고,온도가 조금 더 높다는 것일까... 혹시라도 또 다른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책망할까 해서 그를 바라봤다. 쾌락에 젖어서 내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한번의 방사를 끝낸 그의 페니스를 다시 흥분시키면서 손으로는 바쁘게 옷을 벗었다. 그가 좋아하는 상아색 피부의 버츄얼은 요염하게 금발머리를 쓸어올리면서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짧게 쉼호흡을 하고 천천히 그의 몸 위로 내려 앉았다. "...하아...읏..." "..나에쥬..." 그가 내 허리를 잡아주었고,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최대한 다리를 벌려서 그의 몸으로 더 깊숙이 내려 앉았다. 잠시 거칠게 조이던 내 몸이 조금 풀어지면서 인상을 쓰던 그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너무 예뻐..." "...바보..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는 그의 말에 입을 삐죽였다. 천천히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흥분하고,나 역시 점점 달아올랐다. 그의 위에서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고,내 몸 안에 뜨거운 액체가 번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의 가슴으로 얼굴을 포갰다. 그가 긴 손가락을 내 머리카락속에 넣으면서 빗질을 했다. 그 기분좋은 느낌에 잠시 내 몸안에서 곧 미끈거릴 젤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나에쥬.우리 밥먹고 갈까?" "..밥?" "응..간단한 초밥 정도는 있을껄..맛도 비슷할 것 같고 말이야..." "...흐음..." 선뜻 그러자고 대답을 하지 않는 나에게 루이가 말했다. "또 젤리?내가 빼줄까?" "...바보!!!!!!!!!!" "...아..알았어...미안미안...참을 수 있겠어?" "...몰라...돌아갈거야." "나에쥬우~" 결국 그와 함께 초밥상을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맛은 실제와 많이 비슷했다. 내가 미식가도 아니고,어차피 뇌의 화학신호로 맛을 느끼는건 현실이나 가상세계나 마찬가지 아닌가... 맛없는 초밥보다 이 서버 안에서 먹는 허상의 초밥이 훨씬 더 나았다. "초밥 좋아해?" "음...간식으로...실은 못 먹던 거야..." "정말?" "응...그런데,아..나에쥬도 봤지?저번에 그 빨강머리." "응...개발팀이라는.." "그래.미야기가 몇 번인가 간식으로 사오더라고...그때 개발팀 야근에 몇 번 끼었었거든...그때 맛을 붙인거지." "그렇구나..." 사실 미야기는 학부시절만 해도 초밥하고는 담을 쌓은 인간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 이혼을 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어머니가 동물보호운동가였기 때문에 야채 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집 밖에서 몰래몰래 핫도그나 패스트푸드를 먹곤 했지만,날생선은 그야말로 천적이었다. 그런 그를 초밥에 길을 들여놓은 것은 내가 기숙사에서 나와 잠시 자취하던 시절 근처에 살았던 란 삼촌이었다. 나도 초밥은 그닥 잘 먹는 편이 아니었지만,그때 란 삼촌의 영향으로 미야기나 나나 툭하면 초밥!을 외치고 뛰어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나에쥬.학교가 어디야?" "...학교?" "응." "...MIT..." IM의 아르바이트의 90%가 MIT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개발팀이나 체크팀 대부분이 MIT였고,그런식으로 연줄연줄 취직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졸업반은 아닐테고...그럼 혹시 진..이란 사람 알아?" 그의 입에서 내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릴뻔 했다. "...어...?" "우리 개발팀인데 말이야...미야기나 다른 팀원들 말로는 학부시절 날렸던 천재래." "...그걸 왜 물어봐.당신이 보기엔 안 그래보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확실히 내가 아닌 얼굴을 뒤집어 쓴 난 나에 대한 얘기를 슬쩍 떠보기까지 했다. "아니..체크팀에서 노닥거리는걸 내가 개발팀으로 보냈거든.아이디어도 대단해.사실 이 서버..진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거야." "흐응..." "그래서 아나 싶어서...라이라 말로는 인공지능까지 건드린다는 것 같은데..."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안돼." "..왜?" "내가 개발팀으로 보냈다고 날 미워하고 있어...미야기나 라이라는 원래 그런성격이라고 그러는데...무서워." 그의 말에 난 기가막혔다. 미야기의 말이 맞았다. 이안은 나를 무서워하고,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대충 짐작은 했지만,실제로 그의 입에서 내가 무섭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나서,내일은 그와 마주친다면 조금은 부드럽게 웃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얼굴이 마주치자마자...어제밤 서버 안에서 대담무쌍하게 그의 위에 올라탔던 내 버츄얼이 떠오르면서... 그대로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진..점심 뭘로 먹을까?초밥 먹을까?오랜만에..." "글쎄.오늘 아침에 루가 그러는데..초밥 먹지 말라던데.생선에서 유독성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하던데?" "누님의 잔소리가 있었구나..뭘로 하지?" "그냥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떼우자." "공원에서?" "그러지 뭐." 미야기와 함께 샌드위치를 사들고 공원으로 갔다.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콩알만하게 보이는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자." "아.고마워." 미야기가 건낸 음료수를 받아들고 살짝 웃었다. "웃지마." "에?" "그렇게 웃지 말라고...너 말이야.좀 자각을 하란 말이야.학부시절에도 그랬지만..요즘은 어째 더 심해졌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 은근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면이 있단 말이야...무지 차갑고 강해 보이는데...그렇게 웃을때면 엄청 보호본능을 일으킨다구..." "바보같은 소리." 미야기의 시덥잖은 농담에 내가 손을 내젖자,그가 정색을 한다. "무슨~너 알게모르게..학부때...그 수학과 선배랑 사귈 때 말이야...여기저기서 이를 갈았다구." "..그 사람 인기 많았었지.." "그 인기 많은 사람을 잡은게 너라는거다.알겠냐?옛날엔 안 그러더니..요즘은 어째 자신감 결여증세까지 보이네~" 미야기가 혀를 끌끌 찼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된 것...다 누구때문이더라... 환상을 뒤집어쓰고 사랑받으려고 하는 바보같은 몸짓. 실재를 보면 기가막힌 듯 웃어버릴 것 같아서... 당신이 집착하는 그 블론디 요정이 실은 나야!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절대로 들켜선 안될 것 같다. 내 자신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길게 끌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데이트를 하거나,만나는 사람 없어?" "응...있으면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가..." "갑자기 왜?" "아니...러브머신에 매달려 살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당신이라는 사람." "그런말 가끔 듣지...이 안에서 동료들을 봤을때도..다들 키득거리더라고.안 어울린다나~" "그래?" "아...내 버츄얼 말하는게 아니야.나 실제로는 이 버츄얼보다 훨씬 잘난 인간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웃어버렸다. "왜 웃어?안 믿는거야?" 그가 갑자기 허리를 끌어안고 간질렀기 때문에 난 두손을 들었다. "항복..믿을게...쿠쿡...그만해..간지러워~" "..나에쥬.나에쥬는 실제로 데이트 하는 사람 있어?" "...글세..." "뭐야!불공평하잖아.난 솔직하게 말해줬는데..." "이 버츄얼보다 더 잘난 남자가 혼자일 리가 없는데...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음...그냥 다들 내가 있으려니~해서 접근을 안해...잘나도 고민이야." "...바보..." "바보는 바보지~" 루이가 양 손으로 내뺨을 쓸어내리면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에쥬...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거야?...그래서 날 만나는게 그 사람한테 미안해졌어?" 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사실,소프트웨어가 출시된 뒤로 벌써 2주가 넘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판매순위 1위를 지키고 있는 소프트... 서버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루이를 기다리다가 보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루이가 달려와서는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사람들을 쫓아내곤 했다. 나에쥬는 루이의 것이라는걸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두주 넘짓동안 이 게임방에 자주 들어오는 사람들은 나와 루이에 대해서 사귄다고 말을 할 만큼 루이는 유난스러웠다. 그랬기 때문에..지금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는 루이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나에쥬..." "예전부터...꽤 오래됬어...하지만,미안해하지는 않아...어차피 짝사랑이고..그 사람이 나를 봐줄 확률은 0에 가깝거든...아니..0일지도 모르지..." 쓰게 웃었다. 난 당신한테 지금 당신이 좋다고 얘기하는거야. 이 버츄얼을 뒤집어 쓴 루이가 아니라... 실재하는 이안 루를 말이야. 당신 말대로 실재의 이안이 루이보다 훨씬 더 멋있고,근사해... 난 이 버츄얼보다 현실의 당신을 더 사랑해... 하지만,당신은 나라는 존재는 모르고 이 버츄얼만을 좋아하잖아... 그러니까..확률은 0인거야. "나에쥬..." "뭐야..왜 심각해지는건데?갑자기...웃기만 해도 시간이 얼마나 금방 가는데...왜 시무룩해지려고 할까?" 루이의 굳어진 얼굴을 펴려고 손을 들어 그의 양뺨을 아기 다루듯이 부벼주었다. "나에쥬.나와 만나자." "만나고 있잖아.소프트까지 팔아놓고선..." 장난스럽게 받아치고 돌아서서 맥주를 주문하려고 했다. 그런 나를 갑자기 그가 돌려세웠다. "실제로 만나자고." 당황스럽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적당히 서버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없는 그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그 역시 내 버츄얼 같은 인물이 실제로 나타날때까지 위안을 삼으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포기하듯,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짝사랑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게임... 블론디 요정과의 연애를 꿈꾸는 그를 위로하는 게임... 그것으로 끝났어야만 한다. "...무슨소리야?" "너하고 같이 자고,같이 일어나고,같이 밥먹고,같이 드라이브도 하고싶어.안돼?" "같이 자고,같이 일어나고,같이 밥도 먹었고...드라이브는 조금 무리겠지만..할 수 있는건 다 할 수 있잖아.이 안에서." "...나에쥬...사랑해." 그의 말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현실의 나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을...내 버츄얼이 듣고 있었다. 이안 루가...존재하지도 않는 이 버츄얼을 사랑한다고 한다. 성격과 목소리는 나이고,외모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의 이상형... 그것들이 합쳐져서 나에쥬가 만들어졌고,그런 나에쥬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느정도 내 목소리나 성격도 좋아해 준다는 얘기겠지... 하지만,그것에 기뻐할 만큼 바보가 된 건 아니다. 오히려...허상을 만들어서 그의 사랑을 얻어낸 바보같은 나에게 조소를 보내야만 했다. "..당신 바보야?버츄얼을 사랑하다니...정신과 상담 받아봐." "나에쥬!" "이쯤에서 확실히 하자.난 금발에 미친 당신한테 위안을 주는 버츄얼이야.당신은 짝사랑만 하는 바보같은 나한테 위안을 주는 버츄얼이야.우린 서로 실재에서 채우지 못하는 걸 채워주는 존재일뿐이야.그걸 현실로 끌어내려고 하지마!...그렇게 되면...모든 룰이 깨지게 되는거야...돌이킬 수 없게 되버려.....서로가 다치게 된다구...." "나에쥬!!" 방을 나서려는 나를 그가 붙잡았지만,나는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서 종료를 하려고 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거칠게 잡아챘다. "왜그래?" "...왜 거짓말을 했지?" "...뭐?" 당황스러웠다. 무슨 거짓말...어떤 것? 그에게 나를 속인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엄밀히 말하자면 감춘것이겠지. "...IM의 직원이지?아르바이트라는 거 거짓말이잖아." 설마...이안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걸까? 그럴 리가 없다.그렇다면 이런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가슴이 세게 요동치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내가 아르바이트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미야기에게 물어봤어...아르바이트도 데모버전을 살 수 있냐고...미야기 말로는 아르바이트한테는 데모버전의 인증번호가 틀리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는 은근슬쩍 나를 넘겨짚으려고 한 것이다. 싸하게 심장이 내려앉았고,조금은 진정되었다. 하지만,여전히 위험했다. 그의 옆에는 친하게 지내는 미야기가 있고,이안이 물어본다면 미야기는 무엇이든 말해줄 것이다. "내가 직접 소프트를 샀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거네?" "직접 샀을 리가 없잖아.나에쥬는 그전부터 오프라인 접속을 자주했고,이 소프트에는 이 이상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그런 너가...이 소프트를 아침부터 줄을 서가면서 샀다는건 상상할 수 없고...더더구나,미리 예약주문을 해놨다는건 믿을수가 없어.그러니까...나에쥬가 회사직원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직접 샀다면?" 딱 잡아떼면서 말했다. 지금 버츄얼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얼마나 떨리고,울고 싶은지...얼굴에 다 나타났을테니까... "나에쥬..." "멋대로 상상하지마.그리고,내가 당신을 만나는 건 이 안에서만이야." 그의 말을 더 듣기 전에 종료 버튼을 눌렀고,나는 서버에서 사라졌다. 러브머신의 캡슐을 열고 나오면서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것인지... 차라리 내가 모르는 아무 금발머리 버츄얼에게나 반할 일이지... 왜 하필 나인가... 어째서... 비참하다. 서버에 접속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이안은 미야기를 만나러 개발팀에 자주 왔고,나는 그가 올때마다 다른 일을 찾아서 하면서 일에 몰두하는 척 했다. 아무리 내가 강심장이라고 해도..(그렇지도 못하지만..) 그를 마주볼 용기라는 건 없는 것이다. "진.서버의 인증번호 메모리...버그는 없지?" "어...아직까지는 통역서비스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고..별 문제는 없어보여.왜?누가 버그 발견했대?" "아니...어제 잠깐 중국어 통역 서비스를 받았는데...그쪽에서 보이스가 이중으로 들린다고 해서." "그건..그쪽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거 아니야?보이스 파일이 잘못되었던가..." "글쎄...그냥 좀 알아봐야겠어." "응..." 그때까지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몰랐다. 나는 이안과 미야기를 너무나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이안이 그렇게까지 나에쥬에게 빠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버츄얼 아이돌에게 부리는 투정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사장이라는 권한으로 미야기를 시켜서 서버를 뒤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전혀... [진.어서오세요.] "루.간단하게 샤워만 하고,저녁은 먹었거든...맥주 좀 준비해줘." [그럴게요.] 샤워를 끝내고 맥주를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루이와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지 3일... 컴퓨터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졌다. 그저 어쩌다가 한통 보이는 이메일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이메일에 편지가 들어 있었고,진우삼촌이 보낸 것이었다. 그동안 밤마다 러브머신을 끼고 살았으니 전화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몰랐다. 란 삼촌의 일마저 잊고 지냈다. 진우삼촌은 란삼촌에게 싹싹 빌어서 일은 잘 해결되었으니..걱정하지 말라고 했고,크리스마스에 꼭 오라는 말을 남겼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코앞에 닥쳤다고 해야할까... 슬쩍 루이의 말이 생각났다. 크리스마스에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친척집에 가지 말라고...그런 말을 하던 남자. 가슴이 아리다. 할 일도 없고,잠은 오지 않았다. 낮에 미야기가 통역서비스에서 버그가 보였다는 말이 생각나서 서버 자체를 열었다. 서버를 여는 것과 동시에 서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의 작업량... 미야기? 그런데 어째서 버그수정이 아닌 인증번호 메모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서버의 인증번호 메모리는 접속한 인증번호가 누구와 접촉했는지 등을 4일동안 보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검색하거나 다시 만나기 쉽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서버는 인증번호를 쿠키 프로그램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머리가 잽싸게 돌아갔다. 미야기가 인증번호를 뒤지고 있는 이유가 뭘까. 미야기가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가 어느 한 인증번호와 다른 인증번호들을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패스워드 해독 프로그램과 비슷한 대조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들키지 않도록 미야기의 서버로 들어갔고,미야기가 대조하고 있는 인증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이전에 회사서버를 사용했을 때 서버구축을 위해서 저장해 두었던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아니기를.... 미야기가 자신이 만났던 사람을 찾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요즘들어서 이안은 자주 개발팀에 찾아왔고,보통때와 다르게 미야기를 데리고 나가곤 했다. 미야기는 그 때문에 나와 한 점심약속을 펑크내기도 했다. 설마...하는 불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미야기에게서 빼온 인증번호를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했다. ... 이안의 번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증번호는 소속을 시스템체크팀으로 하고 있었지만,체크팀의 인증번호를 대충 알고 있는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전 서버의 접속 기록에서 이안의 인증번호가 계속해서 만난 사람의 인증번호에 내가 있었고,날짜가 맞았다. 물론,미야기로 보이는 인증번호와도 자주 만난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지끈지끈...심장 자체가 머리에서 아프게 뛰는 것 같이 아파왔다. 이안 루... 그가 나를 찾고 있다. 3일째 접속하지 않고 있으니..본인도 꽤나 애가 탔겠지만..그정도라면 곧 나를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형에 완벽에 가깝게 일치하는 버츄얼을 만든 죄를 지금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미야기가 내 인증번호를 찾아내는 것은 막아야 했다. 미야기는 나에게 직접 소프트를 건내주러 왔고,내 인증번호를 대충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두주가 넘도록 이안의 인증번호와 지속적으로 만난 내 번호를 알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는 재빨리 데이터베이스를 끄고,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준비를 했다. 마치 학부시절... 이런저런 서버를 해킹하던 때를 떠올렸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마음껏 서버들을 휘젖고 다녔다. 그렇지만,내가 내 회사의 서버를 해킹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선 프로그램을 3차원 입체영상으로 정리해서 좀더 빠른시간에 프로그램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고글을 썼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것이라서인지..조금 귀 뒤가 당겨왔다. 키보드 패드를 손에 끼우고 나는 서버에 들어갔다. 나라는 것을 절대 알려서는 안되는 일이었고, 학부시절 우등생이었던 미야기와의 싸움이었다.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될 상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완성되지 않은 나의 최종병기 섀도우를 꺼내들었다. 방어벽에 붙어서 그 방어벽 자체로 이식되었다가 방어벽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와서 서버 안으로 들어가는 섀도우... 학부시절 섀도우를 만들어 놓고도,섀도우를 잡을 백신을 개발하지 못해서 끝내 묻어 두었던 것을... 서버에 풀어놓다니... 하지만,적어도 지금의 섀도우는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다. 방어벽으로 이식되었다가 떨어져 나온 섀도우...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할 일이었다. 빨리 인증번호 메모리로 다가갔다. 아래부터 미야기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 인증번호를 검색했다. 아직 미야기는 내 인증번호가 있는 곳까지 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남아 있는 메모리에서 내 인증번호를 삭제해 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하나씩 완벽하게 다른 번호로 위장시킨 뒤에 삭제했다. 쿠키 프로그램 내에서 내 인증번호를 찾을 수 없게 만든 뒤에서야 나는 안심하면서 섀도우를 가동시켜서 서버를 빠져나왔다. 내가 들어왔었다는 흔적을 모두 지우고,서버와의 접속을 끊었다. 일을 끝냈을 때는 벌써 새벽 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맥주는 뜨뜻하게 더워져서 김이 다 빠진 상태였고... 불을 붙이고 몇모금 빨다가 알아서 타들어가 꺼진 담배 꽁초들만 재떨이에 즐비했다. "..진!" "응?미야기...맞다.서버의 버그는 잡았어?" "어?응..잡았어.별거 아니었어...진의 말대로 그쪽 서버에도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버는 괜찮아." "으응..다행이네." "진...저기 물어볼게 있는데..." "어?" 미야기는 머뭇거리면서 나를 봤다. 속으로는 굉장히 뜨끔거리고 있었지만,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야기를 봤다. "..아.아니다.아무것도..." 그렇게 말한 미야기는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미야기가 눈치 챈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면 미야기 성격에 당장에 와서 난리를 칠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에도 미야기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라이라는 다른때와 다르게 미야기가 늦게 와도 별 상관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불안하고 몸이 달은 것은 나였다. "...라이라..미야기는...?" "미야기?오너가 불러서 갔어.며칠전부터 둘이 무슨 작전을 공모하는건지..." "작전이요?" "그래...서버가 어쩌고 인증번호가 어쩌고...두 사람 다 무모한 짓을 잘하는 타입이라...혹시라도 서버에다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는거 아닌가 몰라...진..서버 잘 감시해..그 돈키호테들..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예..그럴게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나의 우려는 점점더 현실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안은 미야기에게 내 얘기를 했을 것이고... 정의감이나,남의 연애사에 관여한다던가...는 둘째치고... 재미있는 일에 빠질 성격이 아닌 미야기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불안했다. 미야기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막으려고 인증번호를 지웠지만,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나는 그 인증번호를 지운 것이 얼마나 큰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로비에 손님이 왔어요." "고마워요..." 시스템체크팀에서 같이 일했던 앨리가 복도에서 만나자 마침 잘 만났다면서 전해준 메시지였다. 슈도나 진우삼촌,란삼촌을 떠올리면서 로비로 갔다. 그때,복도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나는 그만 주저 앉을 뻔 했다. 내가 만들어낸 버츄얼 이미지 나에쥬... 그 나에쥬가 현실에 나타난다면..실재한다면... 저 사람일 것이다... 눈부시게 물결치는 플래티넘 블론드. 나에쥬보다 조금 더 짙은 지중해색의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담고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천사와도 같은 사람. 나긋한 목소리... 조용조용한 말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완벽체인 남자... 그런 그와 즐겁게 얘기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이안이었다. ...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다고나 할까... 그가 더 이상 버츄얼에 매달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찾아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나는 복도 끝에 기대어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안과 그의 목소리가 내가 있는 복도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들키지 않도록... 이렇게 흔들리고 아파하는 나를 들키지 않도록... 나는 바보다... ...정말이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한심함...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멍청했다. "..아..진?" "...아..사.사장님..." 뒤돌아 도망치려고 했던 것을 간단하게 덜미를 잡혀 버렸다. "..진..어디 몸이 안 좋은가?요즘 무리하는거야?서버도 안정이..." 이안은 내 걱정을 해주면서 다가와서 뒤돌아 서서 그를 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돌려세웠다. 내 어깨를 잡는 그 손길에... 온 몸이 굳어버렸다. 이 이상은.... 참을 수 없다! 그의 손을 세게 쳐내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나도,이안도...그리고 이안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죄송해요..." "진.나에게 화가 난게 있다면 직접 말로 해줬으면 하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화가 나 있었다. 당연한 결과다. 그동안 나는 이안에게 제멋대로 화를 내는 그런 직원이었고... 지금은 이안에게 외부손님(애인이겠지만...)이 찾아온 앞에서 이런식으로 행동해 버렸으니...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사장이 봐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다급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됐어..진..나중에 시간 좀 내줘." "예?!" 물론,나중에 그를 찾아가거나....(아마 못할지도..) 마주치게 되면 마음 독하게 먹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손님과 같이 있는데 이런 결례를 범했으니..그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시간을 내달라는 그의 차갑고 딱딱한 말투에... 나는... 정말 한심하게도 울어버리고 말았다. 투욱... 손등에 떨어지는 뜨끈한 물기에 잠시 내가 당황했다. "진?!" 이안은 굉장히 당황한 얼굴이었고,그건 이안의 옆에 서 있는 블론디의 요정도 마찬가지였다. "...무안해 하시는거잖아요..." 블론디는 그런식으로 이안을 책망하듯이 말했고... 이안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물을 마구 비벼 닦아내고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괜찮습니다..제가 잘못했는데요..죄송합니다...정말 죄송했습니다.사장님..." 그리고,이안이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복도를 뛰어가 버렸다.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히끅거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지독한 욕심쟁이는 나... 처음부터 블론디 매니아라는 것을 알았으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나... 혼자서 그를 사랑하는 것도 나... 그의 시선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려서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도 나... 그가 말을 걸어주는 것에 달아오르는 것도 나... ... 먼저 반해버린...바보 같은 나의 잘못이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아닌... 새카맣고 지저분하게 곱슬거리는 검은머리를 갖고 있는, 건강해 보이는 꿀빛깔이 감도는 상아색이 아닌... 그저 허옇게 시체같이 푸석하게 떠보이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5월의 분홍장미가 아닌... 유난히 새빨갛고 밸런스가 맞지 않는, ...키도 작고...깡 마른... 볼품없는 나... 그의 이상형과는 저 반대편 끝에 서 있는 바보 같은 나... "..죄송합니다...절 찾아오셨다고요..일이 바빠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약간은 충혈되어 벌개진 눈 때문에라도 그들은 내가 하는 거짓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주었다. 안경을 쓴 깡 마르고 큰 키의 남자와 검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일전에도 저희쪽에서의 제의를 받으신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예." "아직도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글쎄요.." "물론 IM에 계신다고 해도 좋은 조건입니다만...저희쪽에서는 더 큰 조건을 걸고 싶습니다...선생님께서 만드셨던 섀도우라는 프로그램을 우연찮게 입수했습니다.이번에 저희쪽에 들어온 신입이 갖고 있던 파일인데...이 섀도우를 좀더 정밀하게 연구해보자는 것입니다." 섀도우라면 정보부에서 탐낼만 할 것이다. 방어벽을 복사해서 위장하고,섀도우 본체를 방어벽에 이식한 뒤에 서버 안으로 침투하는 방법... 적대국이나 다른 나라의 통신장비나 정보의 흐름을 장악할 수 있다. 물론...잘만 다룬다면 말이다. "...저기..전 아직..." "이자리에서 대답하지는 말아주십시오.우선은 조금 더 생각해 주시겠습니까?저희는 IM과는 다릅니다...성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가 아니라,연구의 성의와 질을 높이 보는 '정보부'입니다..." "심사숙고 해주십시오." 두 사람은 명함을 건내주고 돌아갔다. 갑자기 나타나다니... 분명히 요즘들어 어머니에게조차 제대로 연락을 하지 못해.. 아버지가 손을 썼으리라. 나타나자마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다니.. 여전히 아버지는 내가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일하는 것을 불만으로 여기시는 것일까. 애전에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가 보다. 그들의 명함을 살피다가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 것 같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미야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끌고 공원으로 갔다. "진." "...어?" "내가 왜 따로 불러냈는지 짐작은 하고 있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서버를 해킹했고,그때 미야기는 서버 안에 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아니..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 "무슨 의도야?" "무슨 소리야..그게..뜬금없이..." 얼버무리듯이 슬쩍 넘겼다. 하지만,미야기는 여느때와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서버에서 너가 들어왔었다는 흔적을 찾았어.아니..정확하게 말하자면,너였기에 가능할 만큼 깨끗한 서버를 발견했어...왜 서버를 해킹한거지?너한테는 패스워드도 있잖아.굳이 뒷구멍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거기다 타이밍이 나빠...방금 널 찾아왔던 사람들...정보부 사람이지...라이라가 알아봤어." 미야기는 나를 추궁했다. 나는 그의 그런 뚫어보는 듯한 시선을 피했다. "진.대답해줘...솔직한 얘기를 들으려고 온거야...너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서버의 관리자가 서버를 해킹하다니...말이 안돼.너가 그런 무책임한 인간이 아니라는건 내가 잘 알아.하지만,이해가 안돼..." "...사장이 시켰지?" "뭐?" "서버에서 자신과 만나고 있는 나에쥬라는 아이디의 인증번호를 찾아달라고..." 내 말에 미야기는 눈을 크게 떴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미야기는 우습게도 나를 산업스파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서버를 해킹하는 서버의 관리자를 찾아온 사람들이 정보통신부 사람들이다... 거기다,나는 예전에 정보통신부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확정되어 있었다... 미야기가 아무리 나와 오래된 친구라고 하더라도...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서버와 프로그램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좀더 복잡하고,까다롭다는 것 뿐이지...모든 허점은 뚫을 수 있는 부분을 말한다. 정보통신부는 말 그대로 감청이나 해킹을 하는 정부산하의 공권력이다... 그리고,이번 IM에서 구축한 서버는 섹스서버... 그 안에는 유명인사도 있을 것이고... 익명성을 무기로 삼고 해괴한 짓거리들을 해댈 인간도 수두룩 하다... 정부는 유명인사들의 그런 성생활을 덜미로 틀어잡으려고 들 수 있다. 정부의 수퍼컴퓨터라면 모든 인증번호를 기억해 두었다가 접속할 당시의 몇만분의 1초 만으로도 아이피를 추적해낼 것이다... 미야기는 내가 정보부의 사주를 받고 서버를 해킹해서 정부의 수퍼컴퓨터와 연결시키는 무슨 프로그램이라도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배신자라는 오해를 뒤집어 쓰기 보다든 차라리 미야기에게 이안의 일을 덮어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그걸 어떻게..." "...얼핏 들었어...그리고,그날 서버에 접속했을때..너가 사장의 인증번호와 서버 메모리의 인증번호를 대조하면서 그 나에쥬를 찾고 있는 걸 봤어." "...그런데..그게 왜..." "...내가 지웠어." "뭐?" "나에쥬의 인증번호를 지운 사람은 나야.찾을 수 없었지?" 미야기는 멍한 얼굴로 나를 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러번 침을 삼켰다. "...서..설마...진...너가 나에쥬?" "그래...내 이름 철자를 거꾸로 한 거야.JEAN - NAEJ..." 내 말에 미야기는 잠시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했으면 됬잖아...그리고,너 나도 알아봤을 거 아니야.라이라도...이안이 소개해줬을 때..." "그때...그가 이안이라는 걸 알았어." "...그래?" "응...그 상황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진!어차피 회사내에서만 가동되던 서버야.같은 회사 직원인줄 알면서도 섹스를 하고 그랬어...소프트가 공개되기 전이었잖아...너..그것 때문에 오너에게 더 딱딱하게 군 거야?그걸 알고?" "...어쩔 수 없었어." "뭐가!" "...이렇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그가...버츄얼에게 빠져버린다는 것...환상인거잖아.그건...그런데...사랑한다니..말이 돼?!!" "진!그게 아니잖아!이안은 나에쥬를 실제로 만나고 싶은거야...그것뿐이야." "왜 만나고 싶은건데?환상은 환상으로 끝나야 하는 것 아니야?!아무리 블론디에 미쳤다고 해도 그렇지!!버츄얼에 미쳐서 인증번호를 추적해 달라는게 제정신이냐고!사장이라는 권한을 이용해서 그래도 되는거야?이해할 수 없어!" 난 흥분해 있었다.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나에쥬에 미쳐있는 그를 보면서 기가막히고,화가 났다... 하지만,아주 좋지만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나에쥬를 뒤집어 쓴 나를 좋아해준다는 것이 기뻤다... 나에쥬를 찾으려고 미야기를 시켜서 서버를 뒤지게 한 것도..불안하면서도 묘한 쾌감이 흐르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나에쥬가 있었다... 그걸 보고 당황해서 울어버리고... 애초부터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던 제로의 짝사랑은... 그야말로 낭떠러지로 추락해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 내가 이렇게나 바보같고 한심하다는 것... 블론디만을 찾는 그가 미웠고, 그렇게나 나에쥬는 환상이라고 얘기했는데도 억지로 나를 끌어내려고 하는 그가 미웠다. 나를 보면 어떤 얼굴을 할지 뻔히 아는데... 그걸 아는데...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는 그가...미웠다. 흥분해서 말을 마구 쏟아냈을때...미야기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오..오너...진이 한 말은...." 미야기의 더듬는 말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이안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군." "...오너!진의 말은!!" "됐어.미야기.그만해.이건 나와 진의 문제니까." 그리고 이안의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서버에서만이지만..계속 만나면서 조금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완벽한 착각이었군..." "..그..그건..." "됐어.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연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미안하군.블론디 도착증의 사장이라서...사장이라는 권한을 마구 휘둘러서 인증번호를 추적해대는 바보라서 말이야.그동안 그걸 알고 있었으니...나에게 그렇게 대했겠지?한심했을 거 아니야?!" "...나..난.." "그가 진이라는 걸 알았다면 미야기에게까지 부탁하면서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거야.본의아니게...자네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하게 되었어." "..사..사장님!!" 그는 내가 하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인지 휙 돌아서서 공원을 나갔다. 난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었다. "..진!!!" 미야기의 당황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미야기의 예쁘장한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진..." 난 울고 있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그렇게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울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서 얼어붙은 심장을 찔렀고... 얼음을 가르면서 피가 솟구친다. 죽어버릴 것 같아... 너무 아파서...심장이 쥐어짜이는 듯이...너무 아파... "진..." "...혼자 있고 싶어..." "그..그래..." 미야기는 머뭇거리면서 공원에서 나갔고,나는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어디서부터 어긋나고, 무엇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버츄얼을 그렇게 만든 것? 아니다... 애시당초...내가 그를 만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짝사랑 따위로 마음 아파하는건 바보나 하는짓이라고 말했었는데... 말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 언제 내가 그 바보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세상 최악의 바보... 그게 나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나는 사무실로 돌아갔고, 다들 내 눈치만 살피면서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서랍 안에서 박스를 꺼내서 내 개인 사물들을 챙겨 넣었다. "진!!!뭐하는거야?!" 이런 나를 보고 라이라가 놀라서 달려왔다. "미안해요.라이라...나...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요." "진!!!!" 라이라는 고함을 치다시피 나를 불렀고,화가 나 있었다. 그런 라이라를 미야기가 떼어놓고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그 박스부터 내려놔!!!" 복도 끝의 비상구까지 끌려온 나는 미야기 앞에 어정하게 서 있었다. "...미야기..." "무슨 뜻이야?그만두겠다는거야?" "...있을 수 없잖아.." "오너가 바보로 보여?그런 일로 실력있는 직원을 해고할 바보가 아니잖아!!" "..내가 있을 수 없어." "뭐?너 그럼 정보부라도 들어가겠다는 거야?오늘 찾아와서 널 끌어들이고 싶다고 그런거지!!!" "...응...하지만,어떻게 될지는 몰라...하지만,여기엔 있을 수 없어." "한달만 참아!" "...아니." "한달이면 오너도 너도 이 일 다 잊어버릴 수 있잖아!!!!!" 미야기가 내 어깨를 세게 잡아서 흔들면서 소리쳤다. 빈 비상구의 계단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잊을 수 없어." "뭐?" "한달...그런 것으로 잊을 수 있는 거라면..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진..?" "바보같지?나...되게 한심해...최악이야..." "진..설마...너..오너를..." "...처음 봤을때...부터..좋아했어...첫눈에 반한다는거...웃긴다고 했는데..그렇게 되어버렸어...짝사랑하는건 바보라고 했는데...그렇게 되버렸어...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바보가 바로 나였어...그가 블론디 매니아라는거...그래서 내가 그런 버츄얼을 만들어낸거고...우습게도 그가 그 버츄얼에 걸려들었어..그리고 사랑한대...그럴때..난 뭐라고 해야되?사실은 버츄얼과는 정반대인 사람이다...그게 실재하는 사람이다?그게 나다?...내가...내가 뭐라고 그래야 하는건데...대답해봐!미야기!!내가 뭐라고 해야했어?날 사랑한다니까.얼씨구 좋다 하면서 만나?그리고..날 보고 기가막혀 하는 그사람 얼굴을 보라고?...최악의 바보가 되버렸지만...자살기도를 할 만큼 망가지진 않았어...그를 만나라니...자살행위야...차라리..머리에 바람구멍을 내겠어!!!!" "진...이 바보!!!!" 미야기는 나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나는 아까 내지 못했던 울음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다. 미야기는 그런 내 등을 쓸어주면서 달랬다. "...바보 진...똑똑하지만..실은...너무 어리숙하잖아..." 이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명심해.그만두는 거 용서 못해.평생 나하고 절교하고 싶으면 그만둬!알았지?이런 일로 그만두지 말란 말이야!" "미야기!!!내 말 이해 못하는거야?!!!" "휴가야." "뭐?" "라이라한테 휴가라고 말해둘거야.10일동안 유급휴가...서버 구축 때문에 너 고생한거 다 알아..그러니까.다들 별 말 안 할거야..그동안 딴 생각하지마.알았어?바보 같은짓은 이것만으로 족해." "미야기!!" "내 말 들어!!!" 미야기는 자신이 할말만 끝내버리고 막 멈춰선 버스에 나를 떠밀어 태우고는 손을 흔들었다. 쓴 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난 멍한 얼굴로 박스를 들고 버스에 서 있었다. [진!그 박스는 뭐에요?설마..회사 그만두신거에요?] "...아..아냐...그냥...너무 어질러 놔서..좀 치우려고 가져왔어." [놀랐어요...진이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는데...그만뒀나 해서...] "..괜찮아...루..오늘은 그냥 잘래..너무 피곤해서.." [목욕 안 하실거에요?목욕물도 받아놨는데...피로에는 목욕이 좋아요.] "...아니..미안..내일 아침에 할께..내일부터 휴가거든...그냥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않고 자고 싶어." [그렇게 하세요.] 루의 잘자라는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옷을 대충 벗어두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켜서 풀어지지 않았다. 잠은 오지 않고...머리만 아파왔다. 열도 조금 나는 것 같았고...정신이 없었다. 기듯이 일어나서 주방에서 술병을 찾아들었다. 진우삼촌과 란삼촌이 처음 이사했을때..기념으로 가져왔던 술들이 몇병 있었다. 하지만,마시고 싶었던 보드카는 빈병이었고,블랜디와 위스키만 있었다. 그것도 슈도가 놀러와서 마셨기 때문에 반밖에 없었다. 내일은 루에게 부탁해서 술을 좀 살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입구에 입을 댔다. 지독한 알콜 냄새가 입안을 타고 식도를 뜨겁게 달구면서 넘어갔다. 그 짜릿한 아픔에 복잡한 머릿속의 일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 느낌에 매달리면서 어느덧 나는 4개의 병을 모두 비웠다... 그렇게...잠이 들었다... 울면서... 눈을 뜬 것은 사흘이나 지나서였다. 정말 얼굴도 못 들고 다닐정도로 한심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나 였다. 그날...밤새 술을 퍼마신 나는... 극심한 피로와 공복에 마신 독한 술 덕에... 급성알콜중독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사람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란 삼촌이었고, 란 삼촌과 얘기를 하기도 전에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그동안 알콜에 관한 전과나... 약물 남용 전과,자살미수... 뭐..그런 골치아픈 과거가 없었기 때문에 상담을 3시간여만에 끝낼 수 있었다. 상담이 끝난 뒤에 링겔병 걸개를 끌고 느릿느릿 병실로 돌아온 나를 미야기가 맞았다. "...진...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는 타고 났구나?" "..미안..미야기..란삼촌에게서 연락 받은거야?" "그래.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물으시더라." "...말했어?" "그냥..너가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다고만 말했어.그래서 열흘동안 휴가라고도 했고." "...고마워..." 쓰게 웃으면서 침대에 누웠다. 비척거리는 나를 미야기가 부축해 주었고,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누이면서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들 황당해 하지?내 일..." "아니...너 스트레스 쌓이면 무섭다면서.휴가 끝나면 알아서 설설 길거야.다들...." 미야기가 키득거리면서 말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크리스마스에 뭐할래...라이라가 파티하자고 하는데..라이라 지난달에 보너스 받은 걸로 근사한 펜트하우스 계약했거든.다들 집들이 하라고 해서 크리스마스 파티 할 생각인 것 같아." "글쎄...란 삼촌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 "아...그렇구나.난 신년에 인사하러 가야지." "그래..." "...진..." "응?" "괜찮냐고 물어보면 한 대 때릴거지?" "당연하지.발로 찰거다." "알았어.푹 쉬어.나 갈게.내일 퇴원할거지?데릴러 올게." "됐어.혼자 갈거야.알콜중독으로 입원한것도 창피해 죽겠어.분명히 란삼촌하고 슈도가 와서 시끄럽게 할거야.너까지 오는건..." "쿠쿡..알았어...그럼.쉬어.내일 퇴원하고 전화해.집으로 찾아갈테니까.뭐 먹고 싶은거 있어?" 미야기가 내 어깨를 다독이면서 물었다. "보드카." 그의 주먹이 날아와서 내 머리를 한 대 통! 치고는 양볼을 잡아당겼다. "이 녀석!!형님 말을 뭘로 들어먹는거냐!형님을 이렇게 놀라게 한 주제에 말이야!!!" "아.....아았어......가일이나 사아." (아.....알았어......과일이나 사와.) 그제서야 미야기는 착한 어린이라면서 머리를 톡톡 쓰다듬고는 이마에 뽀뽀까지 하고 돌아갔다. 다음날,정오쯤에 퇴원할 채비를 챙기는데,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상대로 란 삼촌과 슈도가 와서 법석을 떨기 시 작했다. "진~내가 안고 나갈까?" "슈도!형이라고 제대로 불러!!!" "누가 형이라는거야~아빠는 눈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누가 누구의 형으로 보여?" "슈도!이 자식!위계질서라는 걸 전혀 모르는구나!!!" "그런거 필요없어!!!!!!" "그래!그래야지 니놈 선배들이 널 끌고가서 패도 할 말이 없지!!!!" "젠장할!!!그 자식들...또 덤비면 죽여버릴테닷!" 정말 이 시끄러운 부자는 오지 말아줬으면 했다. 그래도 진우삼촌까지 오지 않아서 다행...그마저 왔다면 병원에서 퇴원이 아니라 퇴출감이 될 것이 뻔한 일이다. 두사람의 유난스러운 상전 모시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가까스로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메이드 루가 잔소리를 퍼부어댔고,루와 함께 란 삼촌 역시 병원에서 못했던 잔소리를 시작했다.잠시 후에는 진우삼촌까지 와서 난 술에 취해서 병원에 갈 때보다 열이 더 심하게 올랐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것 같아?어떻게 너까지 그럴수가 있어..." [미안해요.진..하지만,저도 엄청 걱정했다는 건 알아주셔야 해요.] "...아..정말이지...넌..." [열은 많이 내렸네요.뭔가 시원한거 드실래요?] "...음...시원한 레몬 스쿼시.물론 알콜은 빼줘." [물론이죠.^_^] 열은 내렸지만,몸은 많이 지쳐있었고,늘어져 있던 정신 때문일까... 루의 잔소리 때문에 인공지능을 이식한 것을 후회하곤 했지만,지금만큼은 너무나 외로워서 루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형체도 없는 시스템이지만 난 루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연인들의 한때라는 둥,이런저런 특집 프로그램들을 보다가 그것마저도 머리가 아파져서 TV를 꺼버렸다. 기분은 점점 더 울적해 졌다. 예상대로였다면 지금쯤 그와 서버 안에서 나름대로 허상의 데이트를 하면서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있을텐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환상은 현실의 나에게 더욱 큰 상처만 줄 뿐이다. 고작 한달 남짓한 그와의 교제만으로도 난 지금 충분히 힘드니 말이다. [어디가세요?] "응...삼촌들 선물 사러..내일은 가봐야 하니까." [눈이 많이 왔으니까.감기 걸리지 않게 옷 두껍게 입고 나가세요.] "응.그럴게." 진우삼촌이 이브날 와서 저녁 먹고 자고가라고 그렇게나 전화를 해대면서 성화였지만,난 그들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찬물만 끼얹을 것 같아서 거절했다. 행복한 사람을 보면 괜히 심통이 난다고나 할까... 유치한 어린아이 같은...내가 발동되어 성격 나쁘게 표출되기 전에 막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갈걸 그랬나 싶을 정도로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건,진짜로 실연당한 사람 같다... "후우..." 눈이 산산히 날리는 크리스마스 이브날의 밤거리는 새하얗게 덮어 씌워져 깨끗하게만 보였다. 인류의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이 날의 원래 의미는 이미 20세기에 퇴색되었지만,역시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그 특유의 연인냄새 풀풀 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경건함이 느껴지게 했다.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배하지 못할 이 기상변화라는 것에 대한 엄숙함이랄까... 철학자라도 된 듯 눈 덮인 거리에서 별별 생각들을 다 연상하면서 와인을 파는 상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아서 미끄러운 길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무단횡단을 했다. 와인 상점은 크리스마스 이브임에도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천정부터 바닥까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치장한 상점. 와인 상점이라면 이맘때가 가장 큰 대목이리라...생각하면서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라는 맑은 목소리의 시스템의 인사와 문에 달린 오래된 방울 소리가 묘하게 어울렸다. 란삼촌과 진우삼촌이 좋아하는 와인의 브랜드를 떠올리려고 애를 쓰면서 높다랗게 치솟은 와인장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가장!맛있는 와인으로 달라는 겁니다.단맛이 강한 걸로!" "손님.와인은 그다지 단맛이 없습니다만...그럴거라면 샴페인으로 하시는 것이..." "샴페인은 안돼요!그 사람은 샴페인을 싫어한다구요!" "그럼..이건..." "그건 비싸잖아요.그 사람은 비싼건 싫어한댔어요!" 누군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적당히 취해서 술김을 빌어 고백이라도 하려는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여직원의 목소리가 조금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꽤나 억지를 부리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면서 카운터 쪽을 봤고,나도 누군가 싶어서 보고 싶었지만 커다란 와인장 때문에 보이지도 않거니와 때마침 사려던 것을 발견해서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아.꺼내드릴까요?" 키가 훤칠한 남자 직원이 영업용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을 걸어왔다. "예.중간 사이즈로 부탁합니다." "예." 남자는 간단하게 발을 들어서 내가 간신히 손가락만 닿던 곳의 와인병을 꺼내들어서 와인 광고 포스터의 모델처럼 병의 라벨을 보이면서 씨익 웃었다. 왠지 포스터와의 대화 같다는 기분에 잠시 웃음이 나왔다. "웃으시니까 보기 좋네요." "예?" "아닙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십시오." "예.감사합니다." 와인장들이 즐비한 곳에서 코너를 돌아 카운터로 가는데 나름대로 직원과 타협을 했는지 아까의 실랑이를 벌이던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다소 섭섭함을 느끼면서... (고백을 하러 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자학하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기분도 든다...) 카운터로 갔다. "아~잘 생겼지?" "근사해.저런 사람한테 고백받는다면..당장에 오케이라고.와인 대신 식초를 사들고 와도..오케이~" "쿠쿡..그건 너무하잖아." "어쨌든...꽤 애를 먹였지만,기분은 좋네." "성공하길 빌어줘야지." "그래~" 곱슬머리의 여직원과 갈색머리의 소년같은 남자가 소곤거리면서 내가 내민 와인병의 바코드를 찍었다. 값을 치루고 나와서 그사이 내 발자국을 덮어버린 흰눈 위를 걸으면서 바람이나 쐴겸 동네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세상은 온통 은색의 축복을 받은 듯 새하얗게 빛이 났다. 높다란 건물 투성이의 이곳에 눈이 덮이자,테크놀러지와 문명의 산물이라는 빌딩들도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높게 건물을 짓고,그 꼭대기에서 세상을 다 내려다 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에베레스트가 세계의 지붕이었고,달과 별들이 이 땅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쩔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벗어나려 하지 말고,융화되라!' 라는 어느 연설가의 말을 웅얼거리면서 아파트 입구에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길거리의 트리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I wish your merry Christmas~ 문을 열려고 열쇠를 꺼내드는데,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분명히 루가 문을 이렇게 놔둘 리가 없는데...라면서 혹시라도 도둑이 들어서 루의 시스템을 부숴버린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서,여차하면 선물로 사온 와인병을 무기로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살금살금 잿빛 카펫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는데,루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세요!당신 신분은 확인이 되었지만,그렇다고 완전하게 이집 손님이라는게 아닙니다!옷을 아무데나 벗어두지 마세요!소파 세탁이 얼마나 힘든건지 아세요?!!구두 거기다 벗지 마세요!셔츠가 젖었으면 욕실 옆의 세탁바구니에 넣어주세요!] 미야기가 온 것일까...하지만,미야기라면 루는 분명히 미야기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잔소리를 할 것이다. 궁금하기도 했고,우선은 루가 신분을 확인해서 집안으로 들였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도둑을 때려잡을 셈이던 와인병도 손에서 내렸다. "어딜 간거냐니까?이 야밤에 말이야!!!" [그걸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전 제 주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의무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난 집에 들여놨잖아!" [그건 당신이 진의 상관이기 때문이죠.그것만 아니었으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거에요!] 상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거실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루는 정체불명의 손님과 말다툼을 벌이느라 내가 온 지는 거의 신경을 못 쓰고 있는 듯 했다. 아니...온 시스템의 가동을 그 정체불명을 상대하느라고 나를 감지해낼 여력이 없다고 해야할까... "흥~뭐야.상관이면 들여보내 준다니!나한테 잘 보이겠다는거야?이봐.넌 메이드 시스템일 뿐이야.진의 마누라가 아니라고!" [호오~은근히 질투하시는 것 같군요.그렇다면 그쪽이 진의 마누라 자리를 노리고 오신겁니까?혈압이 상승하고 계시네요.맥박수도 높아지는 것을 보니..건강에 주의하셔야 겠어요.손님.] 루의 청산유수 같은 사람 약올리는 듯한 말에 난 내가 루에게 말싸움 하는 법도 가리켰었나...싶었다. 좀더 그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싶었다. 실은,정체불명의 정체를 아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는지 놀랍기 그지 없지만,일전에 야근했던 나를 데려다 준적이 있으니 쉽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날 찾아온 이유가 뭘까... 크리스마스 날로 완전히 회사에서 짤리는 것은 아닐까...신년파티는 정보통신부 사람들과 해야할까...하는 망상마저 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라는 사실이... 그리고,조금이라도 기대를 걸고 있는 내 마음이 무너질까봐... 난 애써.루의 말솜씨를 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하면서 싸움을 지켜볼 요양으로 복도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곧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진!언제 오신거에요?밖에 날씨 많이 춥죠?옷 두껍게 입고 나가라고 했는데.만일 감기라도 걸렸으면 당장에 응급차를 부를 겁니다.] "...루...." "...진..." "...아..사장님..." "저 녀석..무지하게 시끄러워."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루의 목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나는 쓰게 웃고는 사온 와인을 넣어두기 위해서 주방으로 향했다. "아..뭐 좀 드실래요?" "아..와인..." 그가 주방으로 와서는 식탁에 놓인 내가 사온 와인병을 보고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이거 좋아해?" "예?" 냉장고를 뒤져서 뭔가 시원하게 마실 게 없나 살폈다. 난 지금 알콜 금지 처분을 받고 있지만,그에게는 뭘 줘야하나...고민했다. 퇴원해서 보니 그나마 남아있던 맥주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루가 모두 버린 것이었다. "...아...드실래요?" "..아니..이거 좋아해?" 그는 먹겠다는 소리는 안하고 어린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좋아하느냐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대답을 원한다기 보다는 좋아한다고 말하면 죽어!라는 식으로 화를 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좋아하진 않아요.이건 굉장히 떫으니까." "그런데...왜..." "선물용이에요.하지만,사장님 드시고 싶으시면 드세요.내일 가는길에 사도 되니까." "내일 어디가?!" "...예?" "...아..아니..어디 가냐고..."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말에 한숨을 섞기도 하고,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폼이 이상했다. 마치 죄 지은 꼬마 같다는 느낌에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근처의 삼촌집에 가려고요...그나저나..어쩐일이세요..오늘 이런저런 파티로 바쁘실텐데..." "...라이라한테 쫓겨났어." "예?" "내가...진한테 못되게 굴어서 진이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었다면서..." "..아..하지만...그..그건...제 잘못이에요...라이라는 모르니까...투정부린걸 거에요...사장님도 아시잖아요.제가 잘못한거라는거..." 그날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새삼 확인하면서 실연당한다고나 할까... 어째서 이런 장면만 리플레이 해야한다는건지...알수가 없었다. 나와 그는 한참을 말이 없이 서로의 시선을 피한체 서 있었다. "아..내가 와인 사왔는데...좋아할지 모르겠어..." 그는 소파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병을 들고 왔다. 와인이라기 보다는 포도주라는 말이 어울리는 달착지근한 스위스산 와인이었다. 하지만,난 알콜 금지 처분을 받은 상태... "저...고맙지만..알콜은..." "아..감기야?" "..예...예." 감기라고 해두자. 당신 때문에 신세 타령하면서 술을 잔뜩 마시고 병원에 실려갔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그는 아쉽다는 듯이 자신이 사온 와인을 잔에 들었고,나는 그 대신 또 다시 레몬 스쿼시 캔을 하나 들고 있었다. "..저.라이라의 말은 핑계야...얘기 하고 싶어서 왔어." "...예?....아...저...죄송하지만...회사는 그만두고 싶어요." "...뭐?" 그는 당황한 듯이 테이블에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뚫는 듯한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눈에 대고 무슨 말을 할지...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알콜 세척 치료를 받고,알콜은커녕 수분도 제대로 입에 안 댔는데...몸이 취하는 것 같다. 아까는 루와 그의 말다툼에 몰랐던,그가 내 집에 나와 단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난 통제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고,어디까지 유치할지...난 그를 사랑하면서 내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 끝도 없는...발전가도를 달리는 주책맞은 근성... "왜 그만두겠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나에게 화를 냈을 때처럼...굳어 있었다. "제가 잘못한 일이 있고,그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다른 뜻은 없습니다." "진이 잘못한 거라면 뭔데?" "예?" "그러니까.진이 특별하게 무슨 잘못을 한건데?...그러니까.그건 익명성이 보장된 속에서 있었던 일이고..." "죄송합니다." 난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일단 막고 보자... 그가 말하는 익명성이 보장된 가상의 네트워크라는 것. 내가 그 루이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었다. 하지만,그걸 지금 이안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내가 나에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애정도 환상으로 끝나버렸는지 모르지만... 난 처음부터 실체를 사랑했던 것이니까.그가 말하는 가상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아픈 말이었다. "미야기도 다른 팀원들에게도 미안하지만,서버 구축 일도 모두 끝났고,다른 일들은 미키와 미야기가 해왔으니까.괜찮을 겁니다..." "진!!!!" "죄송합니다...전 더 이상...회사에 나갈 수 없습니다." 난 고개를 숙였다. "...정통부...그쪽에서 얼마 제시했어?" "...예?" "그날...정부에서 사람들 왔었지.라이라에게 들었어.연봉 계약 다시 하자." 그는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루이처럼...루이가 나에쥬에게 하듯이...그렇게 부드럽게...삐진거라고 생각되는 나를 달래려고 했다. 하...잔인하다...이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 가슴을 후벼 파낼 수도 있구나... "연봉 문제는 없습니다.정통부에 들어간다는 것도 라이라가 오해한 것 뿐이에요." "그럼 왜?뭐가 문젠데!!!" "...제 자신이요." "..뭐?" 그는 내 대답에 조금 당황한 듯 되물었다. "...제가 회사에 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그..그러니까...그러니까..." "응.말해." "...난..아직도 환상에서 산다구요." "에?....진...루이가 좋아진거야?" "그게 아니라!!!!!!당신을 좋아한다구요!!사장님!!!" 아..겉잡을 수 없는 나의 가능성은 우려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난 추하게...엉엉 울면서 소리질렀고,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이젠 될대로 되라..이왕 망가진거 더는 못하겠냐. 이럴바엔 차라리 하고 싶었던 말이나 실컷 하고 화끈하게 실연당하자...라는 기묘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니까...당신이 좋았다구요...처음에 제의받고서 훌쩍...망설였는데...당신을 보고...반해버려서..훌쩍...IM에 들어왔어요.하지만..난 안다구요....당신한테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어차피 열외로 벗어난 인간이잖아...그러니까...난 싫단 말이야!!더 이상 당신 얼굴 맞대고 있을 만큼 강심장이 아니라구!!!!!!..흐엉~" 아...정부에서 혹시라도 무한한 폭주가능성의 두뇌를 찾는다면 난 기꺼이 실험대상이 되줄 생각이다. 내 말을 다 들은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듣고 바보같은 소리 하면... 아무리..아무리 이안 루라고 해도 발로 걷어차 버릴테다!라고 속으로 만! 외쳤다. "...그럼..혹시 나에쥬가 말한 확률제로의 짝사랑이란게..내 얘기였어?" "..........훌쩍......." 끄덕끄덕 거리면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 부벼서 닦아내는 나. 그런 나를 딱하다는 듯이 보던 그가 피식 웃고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서... 대뜸 안아주었다. 루이하고는 다르다... 실체다.. 실제로 심장이 뛰고,피가 흐르는 실제의 이안이다... 하지만,그 포근함과 안락함도 잠시 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놔요!!" "싫어." "...놓으라니까!!!!!!!!!!나보다 잘난 프로그래머는 세고 셌잖아요!!" "아니.없어." "...무..무슨 억지가!!이건!!고용법에 위반된다는.....읍..." 따뜻한 입술이 아직 밖의 추위가 가시지 않은 듯 차가운 내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면서 뜨거운 혀로 내 입술 끝을 적셨다. 정신을 빼놓을 그런 키스도 아닌... 한없이 포근해서 그냥 잠들고 싶게 만드는...그런 키스였다. "내가 필요하다니까.IM은 물론이고..나도 필요해." "...에?" "저기...물론,진도 알다시피..난 블론디 매니아야....그런데...진과 다투고 나서...나에쥬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어...그 모습에 자꾸만 진이 겹쳐져...나에쥬는 사막의 신기루야...신기루를 보고 걸어가면 결국엔 죽어....하지만,내가 진짜 원하는 건 그 신기루의 맞은편에 있잖아...난 현실에서 잡고 싶어.허상이 아닌...진짜를...그래서 왔어.진이 보고 싶었어...행동 하나하나가....생각나고...나한테 처음으로 말 걸어줬을 때가 생각났어.나하고 부딪혀서 울어버린것도...가슴이 아팠어...왜 진은 나를 싫어할까...블론디 매니아라고 했을 때...진이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두려웠어..." 그는 가끔씩 침을 삼켜가면서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젖은 눈가를 쓸어내린 덕에 난 내가 또 울고 있는 걸 알았다. 정말 추할거다... "...거짓말..." "뭐야...-_- 중국계는 나야.진이 아니라고.사람 말을 못 믿겠단 거야?...확실히 좀더 정공법으로 나가야 하나." "?" "사랑해.진...진이 아니면 난 외로워서 아무하고나 막 지내다가 병 걸려서 죽을거야." 루이의 억지를 쓰는 성격은 이안의 성격 그대로였다. 고백을 이런식으로 협박성 발언을 섞어서 하다니... "...그렇게 하는게 어딨어요...." 내가 웃어버리고 말자 그가 다시 내 어깨를 세게 끌어안으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와인 들고와서...분위기 좀 잡은 다음에...하려고 했는데......미안....이런거 처음해봐서...계속 딴소리나 하다가 울려버리고..." "...처음?" "...어...누굴 좋아해서 고백하는건 처음이야." "에에~못 믿어!!!그동안 당신이 스캔들을 냈던 사람만..." "그걸 다 믿는단 말이야?내 말은 안 믿었으면서?!" "...에...이안...그럼 나보고 믿으란 말이에요?아무도 안 사귀어 봤다는 걸..." "..사귀긴 했지만,사랑한적은 없는걸...그냥 금발머리니까...괜찮겠지...싶어서..." 이게 과연 실리콘밸리의 이단아이자,결혼하고 싶은 남자 1순위를 달린다는 우리 사장 이안 루가 맞을까. 과연 내가 첫눈에 반하고,그렇게나 마음고생을 하게 했던 그 남자 이안 루가 맞는걸까... "...처음이야...누가 날 싫어한다는게 이렇게 슬픈 줄 몰랐어.미움받는다는게 그렇게 괴로운 줄도 몰랐고...사랑한다는게 이렇게 행복한건지 몰랐어." 그는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루이의 가슴에 안겼을때와 다른 심장박동이 세차게 뛰는,약간의 불규칙이 느껴지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허상이 아니다. 지금 나를 안아주고 있는 남자는 허상이 아닌 실재한다. 루이의 매끈한 입술보다도,지금 추위에 약간 각질이 일어난 까칠한 입술이 좋다. 매끈하고 따뜻한 손 대신 아직 차가운 그의 진짜 손이 좋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해서 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난 금발이 아니에요." "...-_- 그런건 그저 룰로 정해놓은 이상형이라니까." "룰?" "응......저기..음...나 말이야.진이 나에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미야기를 노려봤어." "에?...왜요?미야기를..." "나에쥬가 확률제로의 짝사랑 얘기가 떠올라서...나 그 녀석 질투했어.어떤 놈인데 나에쥬를 슬프게 할까...막 화가 나는 거야.그리고,진이 나에쥬라는 걸 알게 되었을때...나에쥬가 말한 그 짝사랑이 미야기인 줄 알았거든.그래서 그 녀석이 미워져서..." 그는 잠시 붉어진 얼굴로 쑥스럽게 말했다. 능수능란하게 상대와 즐기는 데이트를 할 듯 싶었던 그는 진심 앞에서 너무나 솔직한 어린아이 같아져 있었다. 루이의 모습일때도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그가 보여준 것은 이 이안 루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이 남자를 보면서 난 작게 웃었다. "왜 웃어." "...난 말이죠...내가 만든 버츄얼이 미웠어요...난 당신이 루이라는 걸 더 먼저 알았으니까...나에쥬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비참했어요...가상의 세계에서까지 내가 끼어들 공간이 없다는 걸 느꼈으니까." "...나에쥬는 인형같이 예뻤어.하지만,진은 나에게 너무 예쁜 사람이야." 아... 이 남자는 내가 어떤 말을 들으면 기뻐할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철저하게 나에쥬를 버츄얼의 환상으로 치부하고,현실의 나를 안아주는 이 남자는 진심으로 상대에 부딪힌다. 진심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키스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멀어질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부드러운 구름 위에서 포근하게 감싸지는 느낌이 온 몸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와 내가 점점 더 대담해져서 서로를 밀착시키고,감정 하나에 충실할 때.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진은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일찍 주무시도록 하세요.그리고,손님은 이만 돌아가시죠.진은 아직 환자에요.] -_-;;이런.. "환자라니..아파?진..어디가 아픈데?!!"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난감했다. 아무리 내가 그를 사랑하고,그가 나를 사랑한다지만 도저히 창피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진은 알콜금지처분을 받았으니까,손님이 가져오신 술은 도로 가져가세요.] "루!!!!!!!!!!!!" "...알콜금지처분?" 아.루의 인공센서를 다시한번 뒤져봐야겠다. 오버센스 정도가 아니라 저건 심술궂어진거잖아!!! "....그러니까....그게..." "진.." "...휴가 첫날....그러니까..속상해서......좀..과음을 했는데...그게...피로도 쌓였고,빈속이었는데다가.....술이 좀 독한거라.........병원에 실려갔어요." 고백하자마자 바로 망신 당하다니 나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그런 나를 보고 이안은 씁쓸히 웃으면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나 때문에..." [이제 아셨죠?진에게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에요!] "..무리한 운동?......그게 뭘까?" [섹스요!뭐긴 뭐겠어요?!!!!] "아.난 진과 그냥 얘기만 하다 갈 생각이었는데..앞지르는걸." 이안은 어느새 루와 말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가벼운 페팅정도는 괜찮아." [페팅이 사정으로 이어진단 말입니다!진은 먹은게 별로 없어서 배출하면 안좋아요!] "그런다고 정력탕진이 되는건 아냐.내 기를 넣어줄거니까." [기요?흐응.과연 그게 기일까?정액은 고작 18kcal밖에 안 되는데요?그리고 그게 소화에 전혀 도움이 안되요!] "...난 그거 말한거 아닌데...이봐.너 은근히 야한거 아냐?" 제발...둘다 그만해 주었으면... 루야 얼굴이 안보인다(없다)치지만,어떻게 인공지능 메이드와 저런 직설적인 말씨름을 벌일 수 있는지 이안에게도 기가 막혔다. [어쨌든!진의 주치의한테 네트로 받은 명령이 있어서 절대 안됩니다.] "이봐.너 너의 진을 뺏겼다는 기분이 드는거야?억울하면 너도 사람 하라구.난 진하고 신나게 사랑할거야." [흥.정신적인 교감은 둘째로 하고 그저 몸으로 즐기겠다고만 생각하는 생각이 유치하군요.] "몸만이라니.난 진이 너무 좋은걸?진의 모든게 다 좋아.몸 뿐만 아니라 진의 성격도,영혼도 사랑해." 그런식으로 고백하지 말라구... 둘은 계속 입씨름을 벌였고,말은 점점 더 직설적이었다. 나중에는 나에쥬와 섹스하는 얘기까지 나오고,루가 무슨 말을 터뜨릴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훗!난 진의 신체 사이즈를 모두 알아요~당신이 아는게 뭐죠?] "섹스할 때 버릇을 알지~.넌 그건 모르지?" -_-;;; 전처와 애인의 다툼으로 보이기 딱 알맞은 대화였다. 결국 난 못참고 소리 질렀다. "둘 다 그만해!!!!!!!!!!!!!!!!!!!!!!!!!!!!!!난 잘거야!!!!!!!!!!!!!!!!!!!!!!!!!!!!" [진!] "진!" 둘이 동시에 티격거리며 나를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기분 좋은 달콤함... 잠결의 와중에도 간간히 루와 이안의 신경전이 들려왔다. 그리고,잠잠해진 실내..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 머리를 당겨 안는 그가 느껴진다. 난 휴가 이후에 술과 수면제에 의존하지 않고 깊고 단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사랑해..." 주문처럼 들려오는 한마디. 버츄얼이 실존이 되고,매트릭스가 실재가 된 나의 꿈같은 현실이다. - FIN - [月綾님] E.O.F (SF VIRTUAL LOVE 續) 외전이라기엔 좀 그런...그냥 에필로그 정도로 읽어 주십시오. 외전은 미야기편으로 쓸 예정이라서요.^^;;; -_- 급조된 느낌이 팍팍 드러나는..엉망진창의 스토리입니다. ....그냥..'월릉 이자식..게으름 피웠군.'이라고 가볍게 씹어 주시길..^^;; 그럼... [E.O.F] ~파일 종료 마크~ 흔히들 프로그래머 집단이라고 하면 해커를 연상하게 되고,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을 천재적인 IQ의 그룹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그들 모두의 IQ를 합친 숫자가 범인 몇 명보다도 높다라던가 하는 터무니없는 수식대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그건 환상이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환상.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컴퓨터와 가까이 있고,왠만한 프로그램을 코딩하는 것도 사람들의 일과에 포함되어 있을만큼 프로그램이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20세기 중반 코볼의 프로그래머들이 귀족대접을 받을 때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던 인류에게 우상이었다. 그러나,그것도 잠시 수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들은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지킬 수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귀족들이 시민들에게 처형을 당했듯이... 한 C프로그래머는 자신이 C를 배울 때 그의 스승은 귀족이었으나,자신이 프로그래머가 되었을때는 일간지 저널리스트보다도 못한 봉급난에 시달려야 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대형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래머를 우상으로 여기곤 한다. 그것은 컴퓨터가 발명된 20세기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오는 근거 없는 관습이다. 아니,인습이라고 해두자. 진짜 머리가 좋다면 하루 24시간도 모자라 며칠밤을 눈이 붉어지도록 모니터를 노려보며 숫자로 대화를 하는 인생을 살까? 적어도,왠만한 IQ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질문에 대해서 "NO!"라고 얘기할 것이다. 주식에 손을 대고 투자회사를 차려서 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며,프로그래머들이 미친 듯이 두들겨 만든 소프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것이다. 그것이 똑똑한 진짜 천재들의 인생이지,지금 이 IM의 개발실처럼 담배연기가 자욱한 곳에 처박힌 인생들이 아닌 것이다. "아악!!!!!벌써 에러메세지가 또 떴어!!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고오!!!!!!!!!!!!!!!!!!!!!!!!!" 개발실은 전면통유리의 사무실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며칠째 야간작업중인 팀원들이 피워대는 엄청난 니코틴의 향연으로 인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미야기는 5시간째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엔터키를 누를때마다 깜찍하게 떠오르는 에러 메시지의 근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버그를 잡겠다며 살충제를 뿌릴 듯 난동을 부리고 마는 미야기. "...자.진정 좀 해." "...진.너라면 진정할 수 있어?" 미야기는 진이 건내주는 콜라캔을 따면서 울먹였다. "이렇게 끈기가 없어서야..." 진보다 머리 하나쯤은 크고,훨씬 어른스럽게 생겼지만...이상하게도 학부시절부터 미야기는 진에게 동생같은 존재였다. 아마도 그것은 미야기의 넉살 좋은 성격과 이 끈기없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진.벌써 나흘째인데...후후훗." 금새 원상복귀한 미야기가 눈웃음을 치면서 진을 봤다. 방금전까지 미야기를 동생같다고 생각했던 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금새 귀까지 빨개져서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다. "...그..그런건 묻지마!!!!" 그리고 진은 사라졌다. "...하아..좋을 때야...그렇지?진?" 미야기는 구름의 얼룩 하나 없이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빙긋 웃었다. 진은 미야기의 말을 떠올리면서 잠시 입술을 곱씹었다. 이안의 얼굴을 못 본 것이 벌써 나흘째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이안은 상당히 불쾌한 얼굴로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있었지만,애써 웃으며 무시하기엔 벌써 나흘째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사실,이안이 딱히 화를 낼 처지도 못 되었다. 갑작스럽게 '게임 소프트에도 도전해 보자!'라는 말을 해서 개발실을 때아닌 야근작업실로 만든 것이 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진을 개발실로 끌어들인 것은 이안 본인이 아니던가. 진은 애써 이안탓이라고 위로하며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복잡한 숫자와 뜻모를 기호들이 인터페이스를 이루는 모니터속의 세계에서 진은 이안의 얼굴을 잊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네트워크 게임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진과 미야기는 서버의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선 토양이 마련되어야 그 위에 씨를 뿌리듯,라이라와 이안이 게임 시나리오 작가와 게임 디자이너를 물색하는 동안 개발실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 토양을 탄탄히 다져두어야 했다. 미야기의 비명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울리고,그런 미야기를 달래느라 애를 먹는 미키와 수십장의 종이와 모니터를 대조하며 버그를 체크하고 또 체크하기를 수십번 거듭하던 진이 서버의 구축을 완성했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다들 제작년에 개봉했던 「프랙털 타임」이란 영화 알고들 있지?" 이른아침 모두의 초췌한 얼굴에 라이라가 함빡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들 그 영화를 기억하기는 하지만,거기에 신경을 쓰기에 그들은 너무나 잠이 부족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개발실 전원에게 라이라는 유일하게 출퇴근을 해서 생긴 생기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그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분이 오실거야.그분이 우리 게임 시나리오를 맡아주기로 하셨거든." "...아..그래요?" 미야기는 방금 비벼끈 담배 대신 새 담배를 물면서 대꾸했다. "다들 좋아하지 않네?" "지금 좋아하게 생겼습니까?우린 벌써 며칠째 야근이었다구요!!!!" 미야기가 볼멘소리를 했지만,라이라는 그의 말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사무실 정리를 하고 담배냄새부터 어떻게 하라고 잔소리를 남긴 뒤에 개발실을 나갔다. 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동안 진은 자신이 엄청난 니코틴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선한 아침공기가 충혈되었던 눈에 안식처럼 찾아들었고,그건 마치 잠으로의 초대장 같았다. 열어놓은 문과 들이치는 맑은 햇살과 신선한 공기. 모두가 밀린 잠에 취한 듯 나른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왔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왔던 신선한 공기만큼이나 너무나 이질적이고 낯선 그가... "시몬 브네뵈라고 합니다.시몬으로 불러주세요." 라고 소개한 그를 보고 진은 하마터면 의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시몬. 버츄얼 아이돌의 이름같은 그는 일전에 진이 이안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끔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진이 만들었던 버츄얼의 환상이 실재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던 남자. 꿀빛이 흐르는 머리칼과 부드러운 상아색의 피부,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눈동자를 지닌 그는 진과 눈이 마주치자 꿈같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진은 그의 미소가 단순한 미소로 비춰지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그를 소개하기 위해 같이 온 이안이 친근하게 서 있었고,누가봐도 잘 어울리는 그 둘을 본 순간 진은 모종의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error C2065] 진의 머리에 에러 메시지의 삐걱이는 둔탁음이 들렸다. "...진...또 시작이구나.또 시작!!!도대체 너의 그 자신감이란건 언제쯤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냐?!!!!" "미야기.잘 어울렸지?그래...그때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진은 벤치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무감각하게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미야기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또 에러 메시지가 뜬거야!!또!!!!!!!!!!" "error C2065." "뭐?" 진은 종이에 무심히 error C2065라는 에러 메시지를 반복해서 써내려갔다.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래라.제발 바람 좀 쐬고 제 정신 좀 차려.지금 너의 상황을 직시하라고.제대로 알란 말이야." 미야기는 자신감을 북돋워 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오히려 그 말은 진에게 역효과가 되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진이 문을 열고 나가자 한숨부터 흘러 나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심한 그의 연인은 시몬이라는 시나리오 작가와 희희낙락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미야기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라.미야기.진은?시몬에게 소개해주려고 하는데." "진이라면 그때 그 분?MIT의 수재라고 들었는데...꼭 만나고 싶었어요." 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천사의 얼굴에 대고 제 아무리 친구를 위해 따끔한 말 한마디 하려던 미야기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나갔어요.바람 쐬러." "바람 쐬러?" 이안의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미야기가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error C2065란 말만 남겼죠." "뭐야.그 수수께끼 같은 말은..." 이안은 불퉁하니 대꾸하고는 게임 제작 회의 일정을 말해주고 나갔다. "권태기가 아닐까." "악담을 해요!!!!" "하지만,맞잖아.벌써 사귄지 1년이 다 되어 간다구." 라이라는 오늘의 컨셉인 오드리 헵번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의 의상을 입고 말했다. "라이라.1년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짧지는 않지.사실,스캔들 대마왕에 블론디 매니아인 우리 오너가 진과 1년넘게 사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구." "...소문 났나요?" "그럼.소문 안 날 것 같아?사람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그런데...왜 진이랑 사귀는 건 스캔들 난거가 아닌지 궁금하네..." "사람들이 진한테는 신경을 안 쓴다는 거겠지...솔직한 얘기로 진은 오너의 이상형과는 정 반대잖아." 라이라는 긴 담뱃대를 톡톡 털어 재를 떨어내면서 말했다. 오래된 DVD에서 보던 오드리 헵번의 우아함보다는 라이라의 이 행동은 기묘한 섹시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라이라.오드리 헵번으로는 안 보이네요." "오드리 헵번으로 보였단 말이야?이거 19세기 파리지앵 패션인데..." 라이라는 자신의 버츄얼을 휘익 돌아 보이며 투덜거렸다. 미야기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이 발을 까닥거리다가 근사한 흑발의 남자가 접근하자 라이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지인~....서버 구축 끝났지?정말 수고했어.그동안..." [진은 자요.] "뭐야..또 너냐?넌 왜 안 자는 건데." [무단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죠.] "...도대체가 1년넘게 드나드는 나를 매번 무단침입자로 생각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저번에는 내가 문 열고 들어왔다고 경찰에까지 신고를 하고 말이야!!너!!!!!" [시끄러워요.어느 무식한 오너의 무책임한 발언 때문에 안그래도 몸 약한 진이 며칠째 야근을 한것만 생각해도...전 지금 제가 갖고 있는 불법침입방지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싶으니까요.] 이안은 16살의 첫 데이트에 애인의 아버지로부터 귀따가운 잔소리와 미움의 눈초리를 받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메이드 루...무서운 그녀의 말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진이 얼마전에 디스켓을 도난 당해 속상해 하는 바람에 메이드 루의 불침방지 시스템을 강화시킨 것이 이안이었기 때문이다. "...젠장할..내가 내 무덤을 팠지." [아셨으면 이만 돌아가시죠.] "여기서 잘거야.그러니까.너도 자." [불법이에요!!!주인이 아닌 사람이 메이드 시스템을 OFF시키다니!!!] "불법 아니야.난 해킹 할 줄 모른다고.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 뿐이야." 루의 잔소리는 시스템이 꺼질때까지 계속되었고,완전히 시스템이 꺼지자 비상등이 켜졌다. 여전히 삭막하기만 한 진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메모판에는 온갖 숫자들의 조합이 써 있었다. 커다란 모니터에도 메모지가 가득하다. [error C2065...처리방법은?] 노란색의 작은 메모지에 씌인 문구를 보면서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야기가 진이 그런말을 남겼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하지만,이 에러 메시지에 대해서 이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진의 책상에 있는 프로그램 코딩 문법책을 한권 꺼내들어 에러 메시지에 대해서 찾아봤다. "정의 되지 않은 식별자....라...이게 무슨 뜻일까." 이안은 조금 더 고민해 보다가 결국 책을 덮고 진에게 갔다. 어린아이처럼 잠이 든 진을 보면서 그는 피식 웃고는 진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집을 나섰다. "미야기.점심 먹자." "뭐야.오너랑 같이 먹겠다고 나가놓구선." 미야기가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 놓으면서 고개를 들어 진을 봤다. 잔뜩 인상을 쓴 진의 얼굴을 보고 미야기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2065야." "또?" "응." "진...시몬은 단순히 시나리오 작가로 온 것 뿐이야." "하지만,내가 갔을 때 둘이 회장실에서 나왔단 말이야." "진." "응?" "너 지금 엄청난 콤플렉스 덩어리로 보여." 미야기는 다시 샌드위치를 들어 한입에 우걱우걱 넣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난 금발도 아니고..." "또.또..." "나도 모르겠어...1년이나 사귄거면 오래 사귄거지?" 우울한 진의 얼굴에 미야기는 한숨부터 내 쉬었다. "차라리 오너와 대놓고 얘기를 해보는게 어때?" "절대 못해!" "왜?!" "...내 입으로 시인하고 싶지 않아.내 입으로 난 당신의 이상형이 아니다라는 말따위...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아..사랑을 하는 남자는 애가 되어 버려..." 미야기는 투덜거렸지만,울먹거리는 진의 얼굴을 보고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만그만..게임 개발만 끝나면 괜찮아 질거야.시몬도 시나리오 작가니까 IM에 눌러앉을 리가 없다구.안 그래?" 미야기는 웃어보이면서 위로했다. 그러나,미야기의 말대로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안그래도 좁은 사무실에 저건 또 뭐에요?!!!!!" 개발실 전원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뭐가 좁다는 거야.그동안 프로그래머의 창의성을 중요시 여겨서 제멋대로 나눴더니 엉망진창이란 말이야!" "그렇다고 러브머신을 폐기처분하다니!!!!!" "어차피 낡아서 쓸수도 없는 거였어.고장 났다고 말했잖아!" "설마..라이라.팀장으로써 저 사무실을 차지할 생각은 아니겠죠?" 미야기가 그동안 창고로 쓰다가 새롭게 단장된 사무실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따졌다. "게임 개발실이야.우리는 엔지니어쪽이니까.계속 이곳에 있을거고,저 사무실은 시몬과 시몬이 데려온 게임 디자이너가 쓸 사무실이야.두 사람이 전체적인 구도를 짜야 하니까.사무실을 새로 마련하자는 오너의 의견이야.어차피 저 방은 잡동사니 투성이였잖아!" 라이라는 개발실 한가운데에 가득한 잡다한 박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는 얘기는..." "그래.시몬이 IM과 1년 전속계약을 했어.정말 다행이지 뭐야.이제 우린 게임 소프트에서도 1위를 하는거야!!!!!" 라이라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이상한 몸짓으로 웃어댔다. 미키는 자신의 박스를 챙기고 있었고,미야기는 슬금슬금 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시몬이 전속계약을 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게임 소프트에 참가하면서 IM과 전속계약을 했다. 그리고,그는 사무실까지 얻었다. "바람 쐬고 올게." 진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개발실을 나섰고,그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안이 시몬을 데리고 들어왔다. "자.새로운 사무실."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시몬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이안을 바라봤다. 그의 아름다운 지중해빛 눈동자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미야기는 진이 나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어라.진은?" "일찍도 물어보시네요.오너." 미야기의 불만스러운 얼굴에 이안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밤샘 야근 때문입니다." "...아..미안하게 생각한다니까.대신 보너스 200%야." "그런게 아니라구요!" "그럼?" 모르겠다는 얼굴의 이안. 미야기는 저 남자를 한 대 쳐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깐 저 좀 보시죠?" "..아..그래...시몬.사무실에 들어가봐.그리고,오늘 오기로 했다는 게임 디자이너 오면 연락 줘~." "그럴게요." 시몬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미야기는 그런 시몬을 한번 노려봐 준 뒤에 이안을 끌고 나왔다. "아참...미야기.진이 써 놓은 메모 봤는데..정의되지 않은 식별자라니...혹시 서버 구축에 문제가 있는거야?" "정의되지 않은 식별자요?" "응.error C2065라고 메모지에 써 놨던데..아직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좀 도와주라구." 미야기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냐...그렇게 봐도 난 임자 있는 몸인데...미야기..설마..너..." "멍청한 오너 같으니!!오버하지 말아요!" "...아..그래 난 멍청한 오너야." 장난스럽게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안과 화를 내고 있는 미야기. "그 에러 메시지가 서버 구축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너.인생에도 에러 메시지는 속출해요.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들이 등장했을 때 당황하게 되죠.작은 에러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2065같이 어떻게 손쓸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그..그래?" "2065란 말입니다.그 메시지가 떴을때..프로그래머들은 머리를 쥐어 뜯는다구요.코딩 전체를 다 뒤져야 하니까요.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하나 체크해야 해요.그야말로 막노동에 스트레스가 엄청난 작업이란 말이에요." "그렇구나..미안.쉽게 생각했어...진은 완벽주의자니까...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수도 있겠다...어떻게 하지?" "...오너." "응?" "지금 내가 하는 얘기의 핵심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군요." "이해하고 있는데...나도 아주 프로그램에 문외한은 아니라구." "아뇨.프로그램엔 어쩔지 모르겠지만...인생을 사는데..특히 연애에 둔해요!!둔하다구요!" 미야기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안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개발실로 들어가 버렸다. 남아있는 이안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그가 내린 결론은 개발실 전원에게 유급휴가를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미야기를 따라 개발실로 들어가려던 이안의 눈에 복도 저 끝에서 걸어오는 진이 보였다. "진!!!" "아.오너." "오너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회사잖아요." "그렇지만..." "어쨌든 회사에요." "알았다구...어쨌든..그동안 너무 수고했어.너무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그때그때 버그가 나면 수정하면 되는거지.안 그래?" "아..예." 이안은 웃으면서 진의 양뺨을 잡고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진의 대답에 이안은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었지만,그는 진의 불안해 보이는 눈은 보지 못했다. 아마 봤다고 하더라도,역시나 진은 완벽주의자니까...라는 말로 멋대로 정의 내렸을지도 모른다. "아참...오늘 저녁에..." "이안~..아니지..오너.게임 디자이너가 왔어요.빨리 들어와요." 이안이 뭔가 조심스럽게 말하려고 하는데,개발실 문을 열고 시몬이 손을 흔들었다. 부드러운 금발과 가늘고 하얀 손이 마치 천국으로 안내하는 천사와도 같았다. 건물의 복도로 들이치는 같은 햇살을 받고 있어도 시몬은 그 빛을 모두 몰아낼 만큼 빛이 났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몬에게 가고,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은 한숨을 쉬었다. "...또 술독에 빠지면 루가 가만두지 않겠지?" 진은 중얼거리며 그 두사람을 뒤따라 들어갔다. "지난달 2천만 달러 공모전에 당선된 슈도군입니다.게임 디자이너로써 이미 프로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다고 정평이 나있죠.나이는 어려도 시몬이 강력 추천한데다가 나 역시 슈도군의 기획서를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으니까.모두 열심히 해 주십시오." 이안이 모처럼 오너다운 발언을 하고 시몬이 웃으면서 소개한 사람을 보고 모두 환영했다. 다만,미야기와 진은 멍한 얼굴이었다. 시몬이 조르고 졸라 데려왔다는 게임 디자이너는 다름아닌 진의 사촌 슈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미야기나 진이 알기로는 슈도는 운동쪽으로 소질이 있었다. 올림픽에라도 나갈 듯이 매일같이 훈련을 하는 그가 언제 게임 공모전에 기획서를 제출했는지,또 당선까지 되었는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말로만 듣던 MIT의 천재 진과 같이 일하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잘 부탁해요.저도 이번에 MIT에 원서를 넣었거든요.아직 합격통지서는 안 왔지만..." "....슈도...군?" "아~슈도군이 뭡니까.그냥 친하게 슈도라고 부르세요.좋잖아요.대선배이신데..." 슈도는 진우삼촌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눈을 찡끗해 보였다. 진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와 악수를 했고,라이라는 슈도 정도라면 MIT에서 부를것이 아니냐며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슈도.어떻게 된거야?" "아~...뭐 이렇게 되어 버렸어.감독이 난 스포츠쪽으로는 성공하기가 힘들대...너무 잡다한데에 신경을 쓴다나..." "그렇다고 순식간에 자신의 진로를 180도 바꿔?" "뭐 어때.어차피 아버지 하던일 도와주기도 했는데...뭐.그나저나 형.비밀이라구.형과 내가 사촌지간이라는거." "왜?" "왜긴 왜야...형이 오너와 사귀는거 소문이 짜아 하두만...거기에 형의 사촌동생인 내가 갑자기 게임 디자이너로 등장했다..라는거.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난 내 실력으로 승부할거야.안 그래도 어리다고 얕잡아 볼 사람들 많단 말이야.이건 아버지의 부탁이기도 해.그렇게 해줄거지?" 슈도는 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진은 어쩐지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천재가족은 마음에 안 들어." "아아...미야기 형님..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씨푸드 페스티벌 티켓을 가져왔는데 말입니다." 슈도가 티켓 세장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이거..가고 싶었던 건데!!오늘 날짜잖아!!!!슈도~~비밀은 평생 보장하마!" "먹을거에 넘어가지마!!!!!미야기!" "진.초밥이야.넘어가지 않을래야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는 거야.그리고,너도 괜히 일 만들어서 사촌동생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해." "..뭐어?" 진이 기막혀 하는데,미야기는 티켓을 뺨에 부벼대면서 즐거워 했다. "형님?" "..알았어!대신.일 똑바로 해야해." "여부가 있겠습니까?선배님.앞으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만해~!!!" 온갖 해산물들의 축제는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것들이었다. 작은 접시를 들고 사람들은 잡지에서나 보던 음식들 앞에서 체면을 불구하고 먹어댔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말이야.식욕앞의 인간에게는 어떻게 할 수 없는거야." "하지만,형들이 만든 매트릭스 안에서는 이 정도 음식쯤 가볍게 맛을 낼 수 있었잖아." "무슨 소리.그건 인간이 원래 갖고 있는 맛의 기억을 끌어내는 역할만 할 뿐이야." "에?" "예를 들어 너가 연어 훈제구이를 좋아한다고 치자.넌 연어 훈제구이를 수도없이 먹어봤어.그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고.맛 없는 것도 있었겠지.매트릭스는 너의 뇌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맛있었던 연어 훈제구이의 맛을 끌어내는 것 뿐이야.이미 기억된 것을 말이지." 미야기가 참치 초밥을 세 개째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거야?사기잖아." "이봐.매트릭스 게임 디자이너가 그런소리 하면 안되지.어차피 가상현실이란 가상현실일 뿐이라고." "진...진짜야?" "응.버츄얼 러브에서 맛없는 음식은 없어.사람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최상의 맛만을 끌어내니까." "어쩐지...랍스타 맛이 형편 없더라니..." 슈도가 투덜거렸다. "슈도.너 버츄얼 러브에 들어갔었단 말이야?미성년자 주제에?!!!" "...그..그거야...게임 공부 차원에서..." 슈도는 말을 다른곳으로 돌리려고 했지만,눈을 부릅뜬 진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번만 봐달라고.10대의 성욕은 식욕에 우선해." 슈도가 장난스럽게 진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애원했다. "란 삼촌에게 이를거야." "설마!!아빠한테 이르지마!!!안됀다구..." "도대체가 진우 삼촌은 결혼까지 했으면서 왜 러브머신을 갖고 있는거야?" "...러브머신 캡슐에 갔었는데 뭐." "뭐야?!!!!" "2시간에 3달러밖에 안해." "맙소사..거기선 성인인증도 안 한단 말이야?" "그거야 손쉽게 따낼 수 있는거고..." 슈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야기는 슈도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진은 10대의 성윤리성과 사회문제라는 거대한 딜레마에 휩싸여 있었다. "저희 IM은 이번 시즌 새 게임을 준비중에 있습니다.게임 시나리오 작가로는 시몬 브네뵈씨와 전속계약을 했고,게임 디자이너로는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만,얼마전 2천만 달러 공모전에 당선된 슈도씨를 영입했습니다." "루 회장님!그렇다면 저번 버츄얼 러브에 이어 IM이 본격적으로 오락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현재 OA 소프트웨어의 산업은 이미 정점에 달해 있습니다.더 이상의 개발이 불필요할 정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저희 IM은 오락 소프트웨어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현재 출시된 OA의 후속작을 기대하는 수 많은 사용자들에게는..." "그렇다고 저희가 OA 산업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계속되는 개발이 있을 것입니다.다만,저희는 그 영역을 OA만 치중하지 않고 좀 더 넓은 사업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이제 소프트웨어계에서 IM의 입지는 단연코 1위를 하겠단 것입니까?" "이미 1위 아닙니까?" 여기자의 말에 이안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만하리만치 느껴지는 어투였지만,그의 시원한 웃음은 농담같으면서도 정점에 선 자의 여유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이안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시몬의 손을 잡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진?" "...이안?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저거 진 맞지?" 게임 박람회에서 IM의 본격적인 게임계의 도전장을 내밀고 내려오는 이안의 눈에는 박람회장 옆에 마련된 씨푸드 페스티벌에서 슈도와 함께 초밥을 먹고 있는 진이 눈에 들어왔다.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진이 눈에 띈 것도 그렇지만,그보다는 진의 접시에 이것저것 초밥을 얹어주는 슈도를 보자 이안의 머리가 급격히 회전을 시작했다. "...슈도군이네요..." "벌써 친해진거야?!!!!" "개발실 단합대회라도 하나보죠." "저 둘밖에 없잖아!" 이안이 이를 갈 듯이 말했다. 그런 이안을 보면서 시몬은 생긋 웃었다. "그렇군요.나도 티켓 있는데...같이 갈래요?" "안 가!" "저 둘 저대로 놔둘거에요?" "...갈게." 시몬은 웃으면서 이안의 팔짱 끼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옆 전시장으로 향했다. "세상에...역시 블론디야." "이안 루는 블론디만 좋아한다구." "잘 어울리네." "시나리오 작가와 소프트웨어 업계의 황태자라...묘하지만 잘 어울리는 한쌍인걸?" "또 스캔들 나겠네." "스캔들이 아니라 진짜일수도 있지." "시몬을 보라고...시나리오 작가로 뒷그늘에 서 있기엔 너무 예쁘잖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진은 귀를 쫑끗 세웠다. 뒤를 천천히 돌아서 보니,시몬과 이안이 사이좋게 새우 철판구이 앞에 서 있었다. "...진!" "...슈도.나 그만 먹을래." "왜 그래?속 안 좋아?" "아니...그런거 아니야." 진은 젓가락과 접시를 내려 놓았다. 그런 진을 보면서 슈도는 이안과 시몬을 번갈아 보고 진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진...자신감을 갖어.내가 아는 한 진은 최고로 귀여운 사람이니까." "...아부하지마." "진!여기서 만나다니...진도 씨푸드 좋아하나봐요?" "...아..예...브네뵈씨도.." "브네뵈씨라니...시몬이라고 부르세요." 시몬은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보고 진은 일전에 자신이 만들었던 버츄얼 나에쥬를 떠올렸다. 시몬의 손짓 하나하나가 그 버츄얼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어떤 몸짓을 해도 사랑스러움이 가득 베어나오는 그런 사람. "...벌써 둘이 친해진건가?" "아.예.오너.선배로써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고 있었죠.개발실의 분위기도 파악할 겸.겸사겸사입니다." "개발실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여긴 너무 분위기상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밥을 같이 먹으면 정이 들죠." 슈도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역시,오너는 시몬과 친하신 모양이네요.두분이 같이 오시고..잘 어울려요." "그러는 슈도군이야말로 진과 잘 어울리네요.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아요." 시몬의 말에 슈도는 진의 어깨를 더 끌어당겨 안았다. "그럼요.동문이라는건 왠지 모종의 혈맹관계 갖다고나 할까요.더구나,디자이너와 엔지니어는 동고동락할 사이 아닙니까?부부나 다름 없어야죠." 진은 슈도의 이 밑도끝도 없는 말에 불안해 하고 있었고,그런 슈도를 보는 이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그의 옆에 있는 시몬이 미묘한 웃음을 띄운체 진을 따갑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느꼈다. 그때,미야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은 그대로 뛰쳐 나갔을지도 모른다. "어라.이게 무슨 이상한 구도의 더블 데이트죠?" 크릴새우 5개를 들고 미야기가 4사람의 보이지 않는 험악한 기류를 단숨에 누르며 나타났다. "더블 데이트라니!!!!!!!!!!!!!" 이안이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미야기는 삐딱한 시선으로 이안을 보고는 4사람의 접시에 새우를 한 마리씩 놓아 주었다. "아.그럼..오너...저는 이만 진과 실례하고 싶은데요.진이 아까부터 고래고기 쪽으로 눈을 돌려서요.가죠.선배." 슈도는 씨익 웃어보이면서 진의 손을 잡고 식용 범고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안이 따라가려는데 시몬이 그의 팔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시몬?" "나 초밥 먹을거에요." "...하지만..." "티켓은 내가 가져온거에요." "알았다구." 이안은 시몬에게 질질 끌려 갔다. 그런 이안의 뒤에 대고 미야기가 즐거운 듯이 새우의 꼬리를 똑 따서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방금 경고 메시지 울렸죠?warning C4013입니다.오너." "뭔소리야......" "그렇다는 거죠.생각해 보세요." "난 프로그래머가 아니야.그런말 모른다구!" "그럼 이 기회에 체험해 보세요.인생은 에러 메시지도 경고 메시지도 있는 거니까요." 이안은 시몬에게 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음식들을 먹었지만 하나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맛도 못 느꼈고,머릿속에는 그저 에러 메시지와 경고 메시지가 정신없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warning C4013] "정의되지 않은 함수....라..." 이안은 사전 두께의 코딩책을 신경질적으로 내려 놓으면서 이를 갈았다. "그래?맞바람이네." "...맞바람이요?그럴리가.오너가 일방적인거라구요.그 블론디가 들어올때부터 진이 얼마나 불안해 했는데!" "하지만,진도 슈도가 있잖아." "그건!!!!....아..말을 말지..복잡해 죽겠네.왜 이렇게 둔해..오너는!" "미안하지만..미야기.니 친구 진은 더 둔해." "...그..그거야...뭐 그렇지만.." "어쨌든,당분간은 두고봐야겠지." "두고볼 수 있어요?벌써부터 개발실 내에서 신경전이라구요.시몬은 사사건건 진의 일에 시비를 걸고,그럴때마다 진은 울상이고,슈도는 진을 싸고 도느라고 손발이 맞아야 할 시나리오 작가와 싸움질이나 벌이고 있다구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구." "라이라!!!!!팀장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해요?" "내 코가 석잔데?남들 사랑싸움 하는데 끼어들어서 이리저리 휘둘리고 싶지 않아." "그게 아니라 눈꼴 시린거죠?" "...흐응...미야기...이번에 유급 휴가는 없던걸로 해줄게." "무..무슨!!!!!!!!말도 안돼!!횡포야!!횡포!!!" "시끄러워.내가 짱이야!!!!!" 라이라는 미야기의 양 뺨을 잡고 이리저리 잡아 늘였다 놓은 후에 마녀같은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젠장...나더러 어쩌라고.나만 가운데 끼어서!!!!!제기랄!!서버 자체가 폭주하는거나 마찬가지잖아!!!!!" 미야기는 테이블에 머리를 투욱 떨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귀여운 빨강머린데?한잔 어때?" 감았던 눈을 힐끔 떠 보니 금발머리의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난 금발 싫어." "..이..이봐..." 남자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미야기는 러브머신의 단축키를 눌러 서버에서 나와 버렸다. "이런식의 서버에서는 제가 구상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구동되지 않습니다.보세요.시나리오는 분명 유클리드가 아닌 위상공간을 전제하에 두고 작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나선형의 위상공간을 구축하려면 서버에 시간차가 들어가게 되요.그렇게 되면 서버의 방화벽 자체에 무리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걸 해결하는게 엔지니어의 일 아닙니까?제 말이 틀린가요?진?!" "말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그리고,그건 디자이너인 제가 할 일입니다.그건 제가 진과 의논해서 결정할 일이구요." "슈도군.저더러 제작에서 빠지란 소립니까?" "그런게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라면 시나리오에만 충실해 달라는 말입니다.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은 월권이에요." "월권이라구요?" "...방화벽에 대해서 다시 프로그래밍 하면 괜찮겠죠...둘다..그만하세요." "아.그럴필요 없어요.진.나선 구조라면 굳이 위상공간까지 갈 필요도 없죠.던전 자체를 미로화 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앞뒤가 안 맞게 된다구요!" 시몬이 두툼한 시나리오를 탁 내려놓으면서 화를 냈다. 거기에 슈도는 시나리오를 집어들어 휘리릭 넘기고는 말했다. "플레이어는 나선구조이든 유클리드이든 못 느껴요.던전 자체가 목표가 되는 거니까.그보다는 아이템 구성에 충실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뭐라구요?아이템 때문에 나선구조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에요!!!나선구조가 우선 확립되어야 아이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시몬이 진에게 시비를 걸고,두둔하는 슈도와 싸우는 매일의 일상이었다. 게임 제작에 들어간지 벌써 일주일째 개발실은 계속되는 신경전으로 모두 날카로워져 있었다. 느긋한 사람은 라이라뿐. "...자자..좀 쉬었다가 하죠.프로그래머를 들볶아서 좋을거 없답니다." 보다못한 미야기가 차를 가져왔다. "바람이나 쐬죠...가요.진." 슈도가 진을 끌고 개발실을 나가자 시몬은 이를 앙 다물었다. 그런 시몬 앞에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으면서 미야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야기는 모니터 앞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했다. 블론디 매니아인 이안 루를 사로잡기 위해 시몬이 등장했다...라는 것이 그의 처음 생각이었다. 하지만,그것뿐만이 아닌 듯 싶다. 시몬의 계획이 이안이라면 진과 슈도의 관계를 십분 활용해서 이안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시몬의 태도에서 뭔가 의문점이 남았다. "...뭐냐...뭐냐...뭐냐..........이거...링크 오류인건가...설마!!!!!!!!!!!" "미야기!일 안해?!!!!!!!" 라이라가 미야기의 모니터를 보고 엉망진창으로 코딩된 괴상한 기호 집합을 보면서 잔소리를 했다. "...링크 오류?" "...라이라!잘못 짚은거에요.우리가!!!" "뭘?잘못 짚어.도대체 이 error C2065하고 warning C4013하고 LINK하고 무슨 관계야?뭐 이런 코딩법이 다 있어?!!!" "자 봐요.처음의 2065는 시몬의 등장이에요." "...시몬이 정의되지 않은 식별자라는 거냐?" "그런 셈이죠.진에게는." "...음...그렇다면 4013은 또 뭐야." "이건 슈도에요.오너에게 있어서 슈도는 정의되지 않은 함수라는 거죠." "함수?" "그래요.어떤 값을 넣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죠.예를 들어 진이 슈도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함수값은 0가 될 수도 있고 1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다는 얘기는...진이 슈도와 완벽하게 바람이 나면 1이 되고,슈도를 거절하면 0이 된다는 얘기냐?" "그렇죠!!!!" "그럴듯해.좋아.그럼 링크 오류는 또 뭐야." "생각해 봐요.시몬이 진이 생각하는대로 2065로써의 역할을 다 해낸다면?" "이안과 진은 끝이겠지." "그렇죠?그런데,거기에 변수로 등장한 슈도가 4013입니다.시몬이 2065라면 4013인 슈도를 십분 활용해야해요.그렇지 않아요?진이 바람이 나야 이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시몬은 슈도를 이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링크 오류라는 거야?" "그렇죠.2065의 시몬이라면 슈도를 적절히 링크시킬텐데 말이에요." "그래서..결론이 뭐냐?" "...시몬이 슈도를 영입하자고 졸랐다고 했죠?" "응." "즉,시몬에게는 진이 2065인 겁니다." "뭐야?!!!!!!!!!!!!!!!!" "쉿!!!!!!" 미야기가 소리치는 라이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이 코딩 자체가 모두 삽질이란 얘기냐?" "그런셈이죠." "시몬과 진의 함수관계는 정의 되었지만,문제는 아직 남아있는 4013의 슈도 아니야?슈도가 어떤 함수냐에 따라서..." "그건 걱정할게 전혀 없어요." "왜?" "...이거 라이라만 알고 있어야 해요." "뭔데..." "슈도는 진의 사촌동생이에요.어떤 값을 대입해도 0이라구요." "...그게 진짜야?" "예.슈도가 오너 애인의 사촌동생인걸 알면 주변의 반발감이 심해진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했거든요.진도 사촌동생이 그런 루머에 싸여서 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걸 원치 않았구요." "...후우..." 라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요?이 오류는 내 힘만으로는 처리가 불가능하다구요." "...어쩔수 없군.너도 동참이다." "예?무슨..." "너 오늘 남아.나랑 야근이야." "....시.." "싫어요란 말 하면...넌 유급휴가 없어." "..횡포에요!" "친구를 돕고 싶지 않니?마음씨 착한 미야기야~." 라이라는 어린아이에게 구연동화를 하듯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참 잘 생각했어요.친구를 도울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에요." "...가식적으로 보여요." 라이라는 생글 웃으면서 다시한번 미야기의 양뺨을 좌악 늘였다가 놓아 주었다. 라이라와 미야기가 코딩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잡은 그때,옥외의 벤치에서는 울먹거리는 진을 슈도가 다독이고 있었다. "진..잘 들어.금발머리는 바보다." "뭔소리야...슈도..." "블론디는 백치다.블론디는 백치다.최면을 걸라고.진이 시몬보다 백배는 훨씬 근사한 사람이야." "...그건 블론디에 대한 편견이야...거기다 시몬은 똑똑하잖아." "아니야.블론디는 바보야.내가 아는 블론디는 다 멍청하고 못 됬다구." "슈도...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괜찮아.너가 보기에도 시몬이 나보다 훨씬 예쁘잖아.이안에게 잘 어울린다구." "그렇지 않다니까.시몬같은 블론디 한 트럭을 가져다 줘봐.진하고 바꾸나.절대 안 그래...걱정하지마.응?" 슈도는 진의 어깨를 안아서 다독여 주었다. "...너..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아.형이라구." "알았습니다.선배님...." 슈도는 웃으면서 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렸을때부터 제 또래의 형제가 없었던 진에게 슈도는 유달리 친한 존재였다.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는데,어느순간 키가 훌쩍 자라더니 그 뒤로는 형 행세를 한다. 하지만,진은 그런 슈도가 편안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진에게 슈도는 늘 어깨를 당당히 펴라며 진의 장점을 열거하기도 하고,때론 말도 안되는 최면을 걸기도 했다. 지금처럼... 진은 슈도의 위로에 애써 웃음을 지었고,슈도는 그런 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진은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지만,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커질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진과 슈도가 다시 개발실로 나갔을때,그들 벤치 뒤에서는 시몬이 훌쩍이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시몬을 찾으러 옥상으로 온 이안이 슈도가 진을 감싸 안아 달래는 것을 본 것이다. "...이안..블론디는 백치에요?" "아니야." "그렇지만....슈도군은...블론디가...백치래요..." "그건 편견이래도." "흑...이안..우리 둘다 차이는거에요?" "넌 시작도 안 했잖아.차이는건 나야.젠장할!!!!!!넌 왜 저놈을 게임 디자이너로 끌어들이자고 한거야!!!" "왜 나한테 화를 내요!!!!난 슈도랑 같이 일하고 싶었을 뿐이라구요!!!!거기다 슈도를 영입하는데 이안도 찬성한거잖아요!" "빌어먹을..무슨 수를 쓰던가 해야지!!내가 이럴줄 알았어!이럴까봐 진을 개발실에 놔둔건데!!!!" "그러게 내가 다시 시스템 체킹팀으로 보내라고 했잖아요!!!" "진이 거기에 와 있으면 회장실에 들락거리는 놈들이 다 진을 넘볼꺼 아니야!!!!그러니까!사람들 왕래가 적은 개발실에 놔둔거라구!너도 그게 좋겠다고 했잖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동양인 프로그래머는 딱 질색이야!" "나야말로 유들거리는 동양인 디자이너는 딱 질색이야!" "...왜 슈도군을 욕해요?슈도군이 어디가 유들거린다고..멋지기만 한걸..." "너야말로 내 마누라 욕하지마!진이 얼마나 귀여운 줄 알아?당차고 야무지기만 하다고!" 이안은 이를 갈았고,시몬은 훌쩍였다. 두 사람의 기막힌 말싸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럼 여태까지 퇴근해서 여기로 왔다는 거에요?" "응.왜?팀장이라고 편히 제시간에 퇴근한다고 실컷 씹었지?나야말로 피곤한 인생이라고." 라이라는 퇴근시간에 맞춰 미야기를 끌고 데이터실로 가면서 말했다. "...전 죽어도 팀장은 안할겁니다." "시켜주지도 않아~." "쳇..." "...정말이지.이번에 유급휴가 한달 받아낼거야.마이애이 해변에서 근사한 남자를 잡을 거라고." "...그전에 몸매관리부터 하는게 어때요?" "미야기.데이터실 벽에 파묻혀서 회사괴담으로 남고 싶니?" "...아뇨..." "그럼 입 다물어." 라이라는 카드키로 데이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는 정신없는 기계음이 돌아가고 있었고,라이라가 이곳에 들락거린지 오래된 듯 데이터실의 관리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힘드시겠어요." "뭘요." "커피는 가득 내려 놓았습니다.도넛도 두박스 배달시켰구요.그럼 수고들 하세요." "예.매번 감사합니다." 관리인이 나간뒤에 라이라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부터 해야 하는데요?" 미야기가 빨리 끝내고 가고 싶다는 듯 말했다. "EASTER EGG 들어봤지?" "부활절 달걀이요?전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요." "너...프로그래머 맞냐?" "아~그 이스터 에그요?난 또 뭐라고..." "그럼 내가 널 데이터실로 불러들여서 삶은 달걀 먹자고 하겠니?" "그렇진 않겠죠..." "자.그럼 시작하자.자.이것부터 봐봐." 라이라는 마우스를 움직여서 무언가를 실행시켰다. 모니터 가득 현란한 조명과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그리고,펑펑 터지는 음향 소리와 함께 새겨지는 글씨에 미야기는 턱이 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이...유치한 발상은 누가 한거에요?" "내 디자인 아니야.오너의 디자인이야.나까지 이 감각없는 디자인에 가담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놀라운 발상이네요.아주 대단해요.우리 오너..." "사람들은 IM의 개발실 팀장이라고 하면 편하게 보지...하지만,결코 아니야.유치찬란한 오너의 뒷치닥꺼리나 하는 거라고!!!!!고급인력을 이런데다가 놀리다니!!!!!!!!!!" "어차피 라이라는 프로그램 개발 때도 기획만 했잖아요.이거라도 시키겠다는 심산이겠죠." 미야기가 도넛을 한입 물어 우물거렸다. "뭐야?너 말 다했어?" "맞잖아요.진짜 고급인력은 프로그램 개발을 해야죠.기획안만 던져놓고 노는 팀장한테 이걸 시키지 그럼,이런일을 미키나 나한테 시키겠어요?" "...미야기..너 어디 두고보자." "왜 그러세요~.마음씨 착한 팀장님~." 미야기는 헤헤 거리면서 아부를 했지만,결국 또다시 라이라의 손에 양 뺨이 잡혀서 이리저리 늘여졌다. "미야기...눈밑이 퀭해.괜찮아?" 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콜라를 가져다 주면서 물었다. 그런 진을 물끄러미 보던 미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삽질 코딩 때문에 그래." "응?" "그런게 있어.어느 바보들 때문에..나만 죽어나...가운데 끼인 나만 죽어나고 있단 말이야!!!!!!!!!!!!!!!!!!!!!!!!!!!!!!!" 미야기는 매일같이 퇴근후의 이스터 에그 작업과 여전히 개발실에서 오고가는 시몬과 진,슈도의 신경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폭주할듯한 조짐이 보이자 진이 뒤로 주춤 물러 섰다. "...너...너랑 오너...시몬..슈도..다 두고봐..그냥 안 둘거야...." "..미야기?" 미야기는 중얼중얼 거리더니 결국 책상에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잠이 들어 버렸다. "라이라..미야기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제시간에 퇴근했는데..왜 그러지..." "놔둬.누구씨들 때문에 폐인되기 일보 직전이니까." 기획서에서 고개를 들면서 대꾸하는 라이라의 눈밑도 퀭한 것을 보고 진은 잠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진 선배!여기 코딩 좀 봐 주세요.버그는 안 보이는데 자꾸 에러 메시지가 뜨네요." "그래?어디 보자..." 미키가 던진 구조요청이 오히려 진에게 구명줄이라도 된 듯 진은 서둘러 미키에게로 갔다. "여기 287번항에 EOF가 떴잖아." "아...천사의 속삭임이군요...error C1004." "조심해야지.자칫 잘못하면 코딩 종료가 되어 버린다구." "예." 미키는 버그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진은 코딩 중간에 갑자기 등장한 파일 종료 마크인 EOF를 보며 재빠르게 수정을 했다. "역시,선배는 금방 찾네요." "어떤 변수든 생각해 놔야지.버그라고만 생각하니까 못 찾은거야." "그렇군요." "컴파일 하고 실행해봐." "예!" 미키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미키가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 동안 진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되요!!이제야 두발 뻗고 자겠네요.고마워요.선배." 미키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미키도 어쩔수 없는 해커 기질이네." "뭐가요?" "버그 때문에 두발 뻗고 못 자는 타입 말이야." "하하..프로그래머들이 다 그렇죠..뭐..." "앗..차거워!!" "자..해커들의 술..콜라입니다." 슈도가 차가운 콜라캔을 미키의 책상에 놓고 다른 하나는 진의 뺨에 가져다 대면서 웃었다. "슈도는 진 선배에게 유난하네.나도 MIT졸업생인데..." "그래서 선배님것도 사왔지 않습니까~." 슈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미키는 피식 웃고는 콜라캔을 땄다. "시원하지?" "차가워." "시원하면서~." 슈도는 콜라캔의 물기가 묻은 진의 뺨을 손을 닦아주면서 웃어 보였다. 그걸 보고 있던 시몬은 사무실의 블라인드를 신경질적으로 내렸다. "...아..여전히 삽질 코딩들이시군...이 소스 어디다 넘겨 팔면 돈이 될까..." 라이라는 알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어머나~슈도!어서오세요.오랜만이네요?] "루.잘 있었어?오늘 하루 신세질게.아파트의 경비 시스템이 해킹 당했거든..." [물론이죠.언제든지 환영이에요.저녁 뭐 드실래요?] "...루..너 슈도한테 너무 친절한거 아냐?이안한테는 늘상 잔소리면서." [그거야 당연하죠.그 남자는 진에게 전~혀 도움이 안된다구요!안 그래도 몸 약한 진을 개발실로 좌천 보내질 않나.게임 개발을 한답시고 야근을 시키질 않나.도대체가 상도덕이 확립되지 않은 고용주라구요!] 루의 흥분된 목소리에 슈도가 진에게 작게 속삭였다. "...1년 넘게 이 집에 드나들었을텐데..어쩌자고 그 인간은 저렇게 미움을 받는거야?" "나도 몰라..둘이 앙숙이야." [슈도.뭐 드실래요?참치가 신선한게 있는데요.] "참치회라..좋지!!!역시 루는 뭘 안다니까." [호호..뭘요.] 주방의 스피커에서는 루의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왔고,슈도는 진이 샤워를 하는 동안 맥주를 한캔 따서 TV를 보고 있었다. "루!!바스가운 다 빨았어?마른거 없어?" [어머나.내 정신 좀 봐.잠깐만 기다리세요.진.금방 건조 시킬게요.] "루.건조할 필요 없어.진 뭐 어때...그냥 나와.바스 타월 있잖아." "그래도 그렇지!!!!!" 진은 투덜거리면서 루에게 건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샤워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루가 날 도와주네." 슈도는 진의 날씬한 상체를 보면서 웃었다. "무슨 소리야.거기다!!너 왜 맥주를 마셔!!!!!!" "...뭐 어때.어차피 성년인데." "그거야 며칠 뒤지!!!" "에이...좀 봐주라구 형님~." 슈도는 웃으면서 맥주캔을 내려놓고 진의 젖은 머리칼을 타월로 털어주었다. "응?아빠한테 이르지마." "너 말이야...도대체가 러브머신도 그렇고!맥주까지!!란삼촌이 알면 울거라구!" "...그렇겠지.내가 아버지 닮아간다고 가끔 울거든." "그러니까!조신하게 행동해야 할 거 아냐!!" "으~잔소리.잔소리~.대신..서비스 하잖아?응?" 슈도는 진우삼촌처럼 웃으면서 어물쩍 넘기려고 했다. 사실,그 웃음에 란삼촌도 매번 넘어가고 진이라고 예외일리도 없었다. 슈도와 진우...이 두 부자의 웃음은 사람을 어쩔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진도 그런 슈도를 포기하고 얌전히 머리를 맡기고 있는데,갑자기 빨간벨이 울렸다. "이놈의 불침방지 시스템!!!!!!!!또냐?!!내가 무단침입자냐?!!어!!!!!" 쿵쿵 거리면서 초밥 상자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이었다. "...아..오너.." "이안..." 진도 슈도도 놀란 얼굴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은 순간 머리꼭지로 피가 솟는 것을 느꼈다. 요즘들어 진이 피곤해 해서 밤에만 살짝씩 들렀다 가던 이안은 모처럼 정시에 퇴근했다는 진과 함께 저녁을 할겸 들렀던 것이다. 그런데,즐거운 식사를 꿈꾸고 진과의 달콤한 시간을 상상하며 들어온 이안의 눈 앞에는 그동안의 오만가지 인상쓴 일들이 현실화 되어 있었다. 반 나체의 진과 그런 진을 뒤에서 끌어안듯이 앉혀 놓고 머리칼을 털어주고 있는 슈도. 이건 누가봐도 오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미안.좋은 시간 방해했네.루 말대로...불침방지 시스템대로네...내가 무단침입자였던 거네..." "이안!그게 아니라!!!" 진이 변명하려고 했지만,때마침 루가 말했다. [슈도.참치회 완성이에요...어라.누가 또 제 보안경비 시스템의 비밀번호를 눌렀군요.바꿔야겠네요.] "루!!가만히 있어!" 진이 소리치고,돌아서 나가려는 이안을 잡았다. "이안..잠깐만..내 말 좀..." "무슨 말?" 되묻는 이안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그는 진의 잡은 손을 내치듯 쳐내고는 나갔다. "...이안...." [속좁은 남자는 저래서 안 좋다니까요.] 루의 눈치없는 말에 슈도가 '쉿'하고 조용히 하라고 했다. "진..미안..나 때문에..." "...나..이렇게 끝난거지?끝나버린거지?이런 오해 받고..끝나다니...벌써 끝나버리다니..." 진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슈도는 그런 진을 안아 다독였다. "어라..어쩐 일이세요." 라이라가 모니터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성큼성큼 다가와 자리에 턱 앉으면서 이안은 사들고 들어온 술병을 늘어 놓았다. "이게 다 뭡니까?" "술.알콜.C2H5OH." 이안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분자식까지..." 미야기가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이안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왜 난데없는 술파티에요?곧 게임 출시라서..이거 하기에도 벅차다구요." "그만둬." "예?" 라이라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이안을 봤다. 이안은 보드카를 병째 들이키고 있었다. "오너..무슨 일 있었어요?" "다 끝났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진하고 끝났다고." "설마." 미야기가 중얼거리자,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안이 술병을 세게 내려 놓았다. "...슈도..그 니글거리는 자식하고 같이 있었다고!!!아주 친근하게!!아니야.그건 친근이 아니었어.진의 젖은 머리를 털어주고 있었단 말이야!!!그건 나만 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이안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라이라는 듣기 싫다는 듯이 그가 내려 놓은 보드카를 집어 들었다. 보드카중 최고의 알콜도수였다. 그걸 단숨에 반병을 비웠으니 아마도 술주정을 할 듯 싶다. "젖은 머리 털어주는건 진의 어머니도 하실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게 아니라니까!!진이...진이..어떻게 나한테..." 이안은 급기야 울 것 같은 기세였다. "...오너..술마시면 우나요?"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 때 울었잖아.진이 자길 미워한다면서.생각 안 나?" 라이라가 작게 물어오는 미야기에게 빠르게 말했다. "아참..그랬지." "오너.그렇다고 내가 한달 동안 야근한걸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는 겁니까?이 유치찬란한 이스터 에그를 만드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쩔수 없잖아...진과 끝났는걸."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진이 직접 말했어요?" "...아니...그래도!보면 알아!!!!!그 상황에 무슨 설명이 필요해!!!!막 샤워하고 나온 진하고 슈도 그 자식하고!!!!" 이안은 라이라의 손에 들린 보드카를 뺏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야기.말해라." "...휘유...오너.술병 내려놔요." "싫어!!!!" 어느새 한병을 다 비운 그가 술병을 내려놓자 미야기가 말했다.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뭐야...난 속상해 죽겠는데..." "진이 작년에 오너하고의 일로 술독에 빠져서 급성 알콜중독으로 실려갔었다구요.알죠?" "...응..." "지금 진이 하는 거랑 똑같은 짓을 하네요." "그래서.불만이야?걱정마.난 내 발로 병원에 갈테니까!!!!!!" 이미 술에 취할대로 취한 오너 이안 루였다. "오너.슈도랑 진이랑 친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그 자식 얘기 꺼내지마!!!!!!" "시끄러워요!미야기 말이나 끝까지 들어요!" 라이라는 이안이 새 술병을 따려고 하자 술병을 세게 잡아 빼면서 소리쳤다. "진의 삼촌들한테 인사갔었죠.오너." "...응.진우 숙부와 란 숙부." "슈도랑 닮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특히 진우삼촌 말이에요." ".......음...그러고 보니..닮은 것 같기도 하고....뭐?!!!!!!!!!!" 이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일어나려고 했지만,의자에서 고꾸라져 뒤로 넘어졌다. 라이라가 그를 일으키면서 제자리에 앉혔다. "진이야말로 오너가 시몬을 데려와서 속을 끓였다구요.시몬을 보면 알잖아요.진이 만들었던 버츄얼 나에쥬...똑같이 생겼잖아요.진은 오너의 이상형이 시몬이라고 생각한다구요.그 녀석은 아직도 자기가 시몬처럼 생기지 못해서 불안해 한단 말입니다." "..시몬을 보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요.진이 우울해 하니까 슈도가 달래준 거구요." "도대체가 말입니다.이놈의 회사는 어째 일할 분위기를 안 만들어줘요.고급인력이 오너의 괴상망측한 이스터 에그따윌 만드느라 밤이나 새고!!게임 개발을 위해서 들어온 시나리오 작가하고 프로그래머는 신경전을 벌이질 않나.그 가운데에서 오너는 삽질이나 하고!!!!!!!!" "...미안..라이라..." "알았으면 술병 싹 들고 사라져요!" "응..." "그냥 집에 갈 생각말아요.가서 진한테 사과하고!진의 얘기부터 들어야지!!!!여기와서 주정이람.아~창피해." "...응..그럴게....." 이안은 힘없이 일어섰다. 하지만,그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고,급기야 바보같은 웃음을 헤벌쭉 지었다. 그런 그를 보고 라이라와 미야기는 혀를 찼다. "저기...이스터 에그 잘 부탁해...진이 꼭 감동해야 하는거야." "...이 디자인으로 감동은 무리에요.쪽팔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안은 방금 마신 술 따위는 완전히 깼다는 듯이 발걸음도 가볍게 데이터실을 나갔다. "...라이라...슈도의 일 말 안했으면..우리도 오늘 일찍 집에가서 쉴텐데요..." "하루 더 야근하는게 나아.말 안 했으면 한달은 삽질할거야.저 인간들은..." "그렇네요..." "아이고..내 팔자야." 라이라는 남아있는 커피를 단숨에 마시면서 투덜거렸다. [무슨 일입니까.무단침입자씨.] "넌 왜 매번 날 그렇게 삐딱하게 보는거야?" [당연하죠.진을 울렸잖아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 [조용히 하세요!진이 방금 울다가 겨우 잠들었으니까.] "...슈도는?" [샤워실에요.] "쳇...누가 알았겠냐고..사촌인지.." "...어라..오너..." 슈도가 샤워실에서 머쓱하게 웃으면서 나왔다. "저기..아까 진짜 오해에요." "알아.미야기한테 들었어." "하아..다행이네요.진이 어찌나 울어대든지...아빠가 알면 날 반토막 냈을지도 몰라요." "란 숙부가?" "아.아빠랑 만났어요?" "응..일전에..." 슈도는 피식 웃고는 맥주를 가져왔다. "무알콜 음료는 없냐?나...술 마셨거든..보드카 한 병 통째로."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이네요." 슈도는 냉장고에서 레몬스쿼시를 꺼내서 그에게 건냈다. [슈도.레몬스쿼시는 진이 가장 좋아하는거에요.함부로 주지 마세요.] "루!!너 말이야!" [흥!] "...어쩌다가 이렇게 미운털이 박혔어요?" "나도 몰라.저 녀석이 일방적으로 날 싫어한다구." "루의 비위를 맞춰두는게 편할텐데...루는 무시무시한 누님이거든요." 슈도는 웃으면서 작게 소근거렸다. [슈도.다 들려요.] "루..그만 자는게 어때?" [흥.내 시스템을 꺼놓고 둘이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내가 자겠어요?더구나,언제 잠을 뒤척일지 모를 진을 위해서 전 깨어 있어야 해요!] "...시끄러워.진이 뒤척이면 내가 안아줄거야." 이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라구요?] "넌 못하잖아.진이 잠을 뒤척이면 꼭 안아서 재울거야.내가." [흥..유치해라.치졸하게 질투나 하는 속 좁은 남자가!] "허이구 무서워라.메이드 시스템이 사람 잡겠네?" 루와 이안의 신경전이 또 시작하자,슈도가 키득거렸다. "...이유를 알겠네." [무슨 소리에요.슈도!] "뭔소리야." "둘이 닮았어요.아무래도 진이 이름을 잘못 지었지.어쩌자고 이름까지 같아서는..." [내 이름이 어디가 어때서요?] "루..몰라?진이 널 새로 포맷할 때 이름 지은거...그게 오너 이름이라고." [설마!!그럴 리가 없어요!] "호오~그렇단 말이야?흐흐흐..내가 이겼다!" [흥.웃기지 말아요.같은 이름이래도 난...] "할말 없지?그럼..잘 자...나의 이름을 딴 메이드 시스템아!" [이..이봐요!!이 무단침입자!!!!!!] 루의 날카로운 미성은 곧 꺼졌다. 시스템을 끄고 은은한 비상등이 켜지자 시스템 버튼 앞에 서 있는 이안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슈도에게 주머니를 뒤져서 카드키 하나를 던졌다. "뭡니까?" "내 아파트.내비게이션 시스템키니까.무인택시에 꽂으면 집까지 안내해줄거야.가서 자." "...차라리 호텔 갈래요." 슈도가 카드키를 테이블에 놓고는 옷을 주워 입었다. "...쫓아내서 미안.처남." "하하...두고보죠.매형." 슈도가 돌아간 뒤에 이안은 술냄새를 없애기 위해 샤워를 했다. 메이드 루를 잠재운 덕에 그는 때아닌 찬물로 샤워를 해야만 했다. "...이 녀석..끝까지 복수구나." 라고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으음....." 진은 잠결에 서늘한 손이 자신을 감싸안자 몸을 뒤척였다. 돌아누운 진을 보고 이안은 가슴이 아팠다. 울다가 잠들었다더니 진의 작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미안...다시는 안 울리겠다고 해놓고서..." 이안은 진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를 좀더 세게 껴 안았다. 서늘한 손과는 달리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자 진은 좀더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있잖아.너 너무 예쁘다고.라이라나 미야기는 나더러 바보 팔불출이라고 하지만...너가 예쁜건 사실이잖아.그 녀석들이 뭐라고 해도 말이야...그러니까.시몬을 보고 속상해 하지마...나한테는 너밖에 안 보여.내 예쁜 새가 날아가 버릴까봐 조마조마하단 말이야.응?알았지?진?" 진은 잠결에 이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잠은 깨지 않았다. 그저 자장가처럼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을 뿐이다. "...음냐...." 진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제밤 일이 떠올라 우울한 얼굴로 침실에서 나오는데,보통은 밝은 목소리로 들려야 할 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주방에서 보통은 들리지 않는 둔탁한 칼질 소리가 들렸다. "...이..이안?" "어라.일어났어?...으악!!피다!!!!!!" "이안!!괜찮아요?!!!!" 샐러리를 썰고 있다가 침실에서 나온 진을 보고 반갑게 웃던 이안은 바보같이 자신의 손가락을 샐러리와 착각한 것이다. 놀라서 달려온 진에게 이안이 피가 졸졸 흐르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상처에 울상인 이안이나,그걸 보고 놀라서 호들갑을 떨며 구급상자를 찾는 진. 어쩔수 없는 커플이다. "..괜찮아요?" "응." "이안..저기..어제는.." "아.미야기한테 얘기 들었어." "..미안해요.얘기 안해서." "나야말로...라이라한테 엄청 깨졌어...저기.진..시몬은 기숙학교 후배야.어렸을때부터 형제처럼 지냈어...그 녀석 블론디라서 다들 얕잡아 보고 그랬거든...동생 같아서 내가 챙겨주던 녀석이야." "으응...나..작년에 시몬이 이안이랑 같이 있는 것 보고 울었잖아요...그래서,나도 예민해져서...사실..시몬이..나에쥬랑 정말 닮아서.." "나에쥬랑 닮았어?" "에에?" "아..그게...나한테 시몬은 완전히 애같아서...전혀 그런 생각 안 했거든." 이안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이안을 보면서 진이 잠시 웃었다. "...화해의 키스." "응.." 이안은 진의 가는 목뼈를 잡고 자신쪽으로 당겼다. 진의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부드럽게 몇 번 빨아당기고는 곧 입속으로 침투했다. 한참을 부드럽게 입안을 누비면서 이안이 진의 잠옷 단추를 풀르려는 순간... 자동 타이밍으로 깬 메이드 루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진!!!다치신거에요?!!!주방에 피가!!피가!!!!!!!세상에나!!피가!!!!!!빨리 911에 신고를!!!!] "...저 자식..또 언제 깬거야?!" [어머나.아직도 계셨군요?출근 안 하시나보네요?] "..루...저기..이안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없..." [어머나.이 혈액은....이런!얼마전 진의 시트를 더럽혔던 정액과 같은 DNA 구조를 갖고 있군요.어쩐지 색도 탁한 것이 촌스럽더라니...] "그래!!촌스러운 내 피다!!어쩔래!!!!" [다행이에요.진이 다친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루는 이안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말야.시스템 좀 눈치껏 끄면 안되냐?왜 번번히 방해야?!" [이른 아침부터 뭘 하기에 제가 방해가 된다는 겁니까?전 메이드로써 임무를 충실히 할 뿐이에요.] "수동으로 꺼주지." [출근이나 하시죠!!!] "오늘 제낄거야!진도 제낄거고!!" "에에?이안.오늘 출근해야 제작이 끝나는...읍...." [어머나!남사스러워라.대낮부터!!!떨어져요!!!!!진은 아침에 저혈압이라서 안 좋다구요!!!!] "...이봐.인공지능이면 알아서 눈치껏 사라져 줘야 하는거야." [인공지능은 손님에게 필요한거겠죠.] "..루..제발 이안하고 사이좋게 지내." [진...진까지..저를..] "루!그게 아니라..." "...이안...그렇게 꺼버리면 이따가 더 난리칠거에요." "뭐 어때.난 저 녀석이 꺼진 다음에 켜지는 이 비상등이 좋아." 이안은 시스템 다운 버튼을 누르고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 웃음에 진은 어쩔수 없다는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처음에 생각나?" "언제요?" "내가 안고 들어왔던 거 말이야." "...응..생각나요." "그때보다 더 가벼워졌어!!!!!!안되겠어.내일부터 식사는 나랑 하는거야!" "...아...정말 닮았어." "..응?누구랑?" "아뇨...아무것도..." 진은 웃으면서 이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부드러운 입술의 마주침. 소중하게 다뤄주는 손길에 진은 눈을 감았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를 느끼고,달아오르는 몸의 쾌락보다는 불안하던 정신이 침착하게 가라앉으며 따스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닿을 듯 닿지 않았던 감정의 끈이 단단이 엮여 매듭을 만들어냈다. "자아!!새 게임 출시!!!드디어 대박!!!발매 일주일만에 5위권 안에 진입했다고!!축하!!!" 라이라가 잔을 치켜들면서 소리쳤고,다들 왁자하게 웃음지으며 건배를 했다. "그리고....음..." "뭔데요?" "드디어 달걀 사냥꾼들이 이스터 에그를 찾아냈습니다!" 라이라가 씨익 웃으면서 블라인드를 쳤다. 잠시 어두워진 개발실에 미야기가 회의때 쓰는 스크린을 내렸다. "짜잔!달걀 사냥꾼들의 홈페이지!" "달걀 사냥꾼?" 슈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미키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스터 에그를 말하는거야.프로그램에 교묘하게 장난을 쳐 놓는 이스터 에그 말이야." "...그걸 게임에까지 넣었다구요?지루한 OA프로그램이면 또 몰라..어차피 오락용으로 만드는 게임 소프트에?" 슈도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뭐엔들 못하겠어?게임 소프트도 플레이어야 즐겁지.만드는 우리는 막노동이라구." 미키가 투덜거렸다. "자...어디 평들을 볼까." 라이라가 게시판의 글 하나를 클릭했다. 화면에 그 글이 뜨면서 모두 조용해졌다. 단 한문장이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유치합니다.] "하하...다른걸 보자...별 시덥잖은 녀석 다 보겠네." 라이라가 애써 웃으면서 다른 게시글을 클릭했으나 반응은 같았다. [찾지 마세요.정말 유치해요.특히 그 감각없는 디자인은...눈 버립니다.] "...젠장!!!이래서 내가 그따위 디자인으로 하지 말자고 한겁니다!!!!" "아니!그게 뭐가 유치하다는거야?얼마나 로맨틱해!!!!!예쁘지 않아?" 라이라가 마우스를 집어던지면서 소리치자,이안은 자신이야말로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유치해요!!!정말 유치찬란했다구요!" "나도 라이라가 보여줬을때...망치로 머리 맞은 느낌이었어요.정말 유치해." "뭐가 유치해!!!" "감각이 없어도 어쩜 그렇게 없을수가 있는지..." "오너의 센스를 의심해봐야겠어요." "...무슨 소리들이야..." 라이라와 미야기,이안이 서로 아웅다웅 다투는 것을 보면서 개발실 전원이 물었다. "카피라이트 옆에 IM로고 있지.그걸 더블클릭하면서 쉬프트키랑 스페이스바를 눌러봐." 라이라가 미키에게 말하자,미키가 재빨리 게임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시키는대로 이스터에그를 불러냈다. 그리고,미야기가 내려놓은 스크린에는 요란스러운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고,불꽃이 하나하나 점화되면서 글씨를 만들어냈다. [진 사랑해.나랑 결혼해줘.] 그 주변으로 유치한 장미꽃잎이 날리는 것은 물론이었다. 불꽃은 하트모양으로 터지고 있었고,팡파레와 고적단의 웨딩마치 음악이 구닥다리 미디 파일로 귀따갑게 흘러나왔다. "...진..." 이안은 굳은 얼굴의 진을 보면서 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하지만,곧 이안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진이 그에게 달려와 안겼기 때문이다. "...이런..울지마..." "...가..감동받은거야?저런 유치한 거에?" "기가막혀!!기가막혀!!!" "...슈도...난 진선배가 천재라고 생각했거든?...그런데..." "미키선배.천재는 범인과 생각하는게 좀 틀려요.어려서부터 엉뚱했어요.진은." "아무리 그래도..저 1960년대식 함수 그래픽이라던가 색감은 문제가 좀 있다고 보지 않냐?" "좀 심각하긴 하네요...저렇게 원색적인 32비트 그래픽은 저도 난생 처음 보는군요.거기다...박물관에나 있을 미디 파일이라니..." "게임의 이미지를 망쳤어." "...게임 타이틀이 어쌔신인데...거기다 대고 이스터 에그로 청혼하고 싶었을까." "...오너도 결코 범상치는 않네요." 진이 감동해서 울음을 터뜨리고,이안과 뜨거운 키스를 하는 동안 개발실 전원은 혀를 찼다. EASTER EGG 1977년 처음 발견된 이스터 에그는 말 그대로 부활절 달걀을 의미한다. 단,장난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삶은 달걀 대신 생달걀로 주변을 즐겁게 한데에서 착안된 것으로,지루한 프로그램 개발에서 프로그래머들이 하는 장난으로 통하고 있다. 때로는 개발진들의 PR이나,때로는 경쟁업체를 의식한 묘한 심리전에도 쓰이는 이스터 에그. 이스터 에그는 프로그램에서 버그 아닌 버그로 사용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물론,사용자의 열에 아홉은 그걸 찾지 못해서 즐거움을 누리진 못하지만,어차피 한 바구니의 부활절 달걀에서 삶은 달걀 대신 생달걀을 받는 사람도 어쩌다 한사람 아니던가? 무엇보다도,그것은 프로그래머들의 작은 이벤트이고 즐거운 장난이다. 그리고,그 즐거운 이벤트를 진에게 청혼하는 방법으로 쓰겠다며 스스로 기발하다고 자만하던 이안 루 회장. 그걸 만드느라 데이터실에서 밤샘을 했던 라이라와 미야기. 즐거운 마음에 이스터 에그 사냥에 나섰던 수많은 달걀 사냥꾼들의 허탈감. 이 이스터 에그로 다음날 신문에 난 요란스러운 결혼기사. 신문기사를 보고 결사 반대를 외치다가 또 다시 시스템 다운을 당한 메이드 루. 진우삼촌과 란삼촌의 축하 전화를 받고 뺨을 붉히는 진과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이안. 마지막으로,32비트 그래픽에 충격을 받은 미키는 귀에 박혀 버린 미디파일의 웨딩마치 때문에 고생해야만 했다. 어쨌든,모두가 행복해진 요란스러운 해프닝이었다. "...하아...이..이안......." "진.사랑해." "나도 사랑해요....하악..." 이안이 부드럽게 진의 몸안으로 들어가면서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마이애미 해변가 특급호텔의 스위트 룸. 두 사람만의 뜨거운 시간에 갑자기 침대 맞은편의 거대한 화상 전화기가 켜졌다. "...결혼 축하해요!!!!짜자잔!!!!!.....................어머나.." "으악!!!!!!!!!!!!" 진은 놀라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고,이안은 침대의 커튼을 쳤다. "무슨 짓이야!!!!!몰상식하게!!!" "...어머나.대낮부터...그나저나..오너...몸매 근사하군요." "..아..진...너무 섹시했어..방금.." "이야~구경 잘 했습니다.매형." "...지..진선배..저..전...저..절대로...안...안..봤어요....." "당장 끊엇!!!!!!!!!!!!!!!!!!!!!!!!!!!!!!!" 이안이 소리치고,화상 전화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꺼졌다.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진을 찾아 들어가는 이안. 이불 속에서 마주친 진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물론,눈에는 눈물을 한가득 매달고 있었다. "...어..어떻게 해..." "뭐 어때." "그..그래도..." "모처럼 루가 없는 곳이어서 좋았는데...어디나 도움 안되는 인간들 투성이야.그렇지?" "...창피해..." "괜찮아.다 못 봤다구.내가 베일 쳐 놓고 있었는데?" "...다들..대낮부터 이런다고...흉볼거야..." "사랑하는데 밤낮 가리게 생겼어?" 이안이 웃으면서 진에게 키스했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다시 열중하고 있었다. 한편,그 시간 마이애미 공항에는 개발진 전원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원이 유급휴가를 받아 마이애미 해변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이 손에 쥔 호텔 티켓은 진과 이안이 머물고 있는 그 호텔것이었다. "...대낮부터 말이야..." "화끈한 커플이 좋죠." "...하아..난...아직도..심장이 벌렁거려서..." "미키 선배...진정 좀 해요.그러다가 오너가 미키 선배 자를지도 몰라." "그..그렇겠지?그..그렇지만...난...." "놔둬.미키는 약국에 콘돔 사러 갈때도 세 번씩 가서 두통약만 사오는 녀석이야." "자...그럼....이 지긋지긋한 커플...골려주러 갈까요?!!!!" 미야기의 말에 모두들 웃으면서 공항에 대기중인 긴 리무진에 올라탔다. -EPILOGUE- 마이애미에 도착한 개발실 전원을 보고,스위트 룸에서 꼭 끌어안고 나오던 진과 이안은 경악을 했다. 그리고,그날밤 라이라가 샴페인을 들고 스위트 룸에 쳐들어 갔을 때 그들은 이미 체크아웃한 상태. 호텔 데스크에 가보니 지배인이 디스켓 하나를 건내 주었다. 디스켓에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고 있는 이안이 5장의 비행기 티켓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이봐...설마 내가 마이애미에만 있을거라고 생각한거야?난 IM의 오너라고.신혼여행이라면 적어도 세계 일주는 기본이야.그럼...즐겁게 유급 휴가 즐기시길...그리고,오늘 일은 모두 인사부장한테 넘겼으니까.알.아.서.들.해.] "...당했다!!!!!!!!!!!!!!!!!!!!" 진과 이안이 근 두달째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있지 않은 IM. 다들 어쌔신의 후작 게임을 개발하느라 열중이었다. 하지만,그보다는 이를 갈면서 진이 돌아오면 부려먹을 궁리 중이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모두가 초췌해지는 프로그램 개발... 그런 와중에 우리의 게임 디자이너 슈도군은 얼마전부터 얼굴에 늘상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뭐냐.슈도 연애하냐?" "아..예..연애 합니다.미야기형님." "오~진짜냐?누구랑?어때?미인이야?연상?연하?남자?여자?" "...하나씩만 물어보세요." 슈도는 씨익 웃으면서 개발실 전체에 콜라를 배달했다. 라이라도 모처럼 재미난 일이라는 듯이 하던 일을 멈추고 슈도에게 시선을 보냈고,미키도 즐거워 보였다. 시몬은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듯 노트북을 붙잡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지만 흘끔거리며 슈도를 훔쳐보고 있었다. "아~딱 내 이상형이에요.검은색 긴 생머리에 애교 만점이죠..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여전하구나.그 검은색 생머리 밝히는건...역시..넌 진우삼촌의 아들이야." 미야기가 웃으면서 콜라를 마셨다. "어디서 만났어?" 미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버츄얼 러브요..." "...뭐냐.매트릭스냐?" "또 가상현실이야?" "아~지겨워~~~~" 라이라는 다시 기획안으로 눈을 돌렸고,미키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들 그래요?얼마나 귀여운줄 아세요.다들 만나보시면 아실거에요...아..귀여운 노미스." ".....노미스?아이디가 노미스야?" "NO MISS냐?" "설마 그렇겠어요?라이라?" "그럼." "NOMIS죠." 슈도가 당연한 것을 질문한다는 듯이 대답했고,모두의 시선이 시몬에게 향했다. 시몬은 흘끔거리던 시선을 재빨리 치우고 일에 몰두하는 척 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이네......뒤집힌 이름이라던가....이상형에 맞춘 뭐..그런것들이 말이야..." "무슨 말이에요?미야기 형님?" 슈도는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고,시몬은 콜라를 마시다가 콜록거렸다. 콜라에 사래가 든 시몬은 계속 기침을 하고,미야기는 키득거리고,미키는 숨죽여 웃었다. 라이라는 기획서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한가운데 서 있는 슈도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E.O.F-